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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Mar 04. 2024

KTX 특실은 누가 탈까?

시간의 효용성에 대한 소고

20년 전 KTX가 첫 개통을 하고, 삼촌이 우리 가족 특실을 모두 태워 서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어린 그때를떠올려 보면 작았던 내가 그 넓은 좌석에 참 편안하게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로 꽤 오랜 기간 동안 나는 그것이 특실인 줄 모른 채 KTX의 모든 좌석이 그런 줄 알고 지냈다. 그리고 고3 때 서울로 논술시험을 보러 가면서 KTX를 다시 탔을 때 그때서야 일반석과 특실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에 있고 고향이 울산이다 보니 명절이나 경조사 등을 이유로 일 년에 최소 열 번은 넘게 타는 것같다. 오랜만에 탄 특실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나처럼 우연히 삼일절 연휴를 활용해 급하게 예매하느라 좌석이 없어 억지로 특실을 타는 사람도 있겠지만 확실히 특실을 타면 일반석과는 다른 공기를 느낀다.

그러면 KTX를 밥 먹듯 특실만 타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SNS에 KTX나 SRT 우등을 검색해 보면 참 다양하다. 비행기 비즈니스석과 비교했을 때, 고작 2만 원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에 KTX는 서비스적으로 보나, 승객의 특성으로 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굳이 차이점이라고 구분 짓자면 조금 더 넓은 좌석, 쿠키와 물, 물티슈, 신문이 제공되고 간단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화면이 있다는 것?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기차로 멀리 가봤자 2시간 반~3시간이기에 효용성 측면에서 볼 때도 크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하기 힘들다. 근데 놀라운 점은 KTX 특실을 타는 사람들은 좌석의 이동이 크게 없으며, 휴대폰이 됐든, 노트북이 됐든 무언가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비행기 일등석에 타는 사람들이 편안한 복장을 입고 편안하게 비행을 한다면, 비즈니스석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이들이 늘 무언가 하고 있다는 건 짧은 시간에도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으로 무조건적으로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삶을 산다고 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기차에서 특실과 일반석 승객을 구분 짓는 것보다 시간의 효용과 그때의 시간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20대 멕시코, 미국, 동남아에서 배낭여행을 할 때가 떠오른다. 미국에서는 하루 숙박비를 아끼고자 카우치서핑 어플을 깔아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해 당일 연락을 해 소파에서 빌려 자고, 멕시코에서는 하루 만 오천 원하는 냄새나는 호스텔에서 몇 박 묵은 적이 있다. 오죽했으면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원룸에서 두 달간 남자 6명이 생활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지가 따로 없다. 근데 불편하면서도 그 덕분에 함께 부대낀 사람을 얻었고,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얻었다.

그 당시는 일박에 50~60만 원 하는 호텔 객실에서 하루만 묵어본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이었다. 근데 막상 일박에 50~60만 원짜리 호텔에서 편안하게 온수 샤워를 하고, 멋진 경치를 보고, 온갖 룸서비스를 시켜 먹어도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정작 별 감흥이 없다.

근데 중요한 건 그때처럼 50만 원의 효용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지금  원룸에서 6명끼리 자라고 하면 나는 자지 못한다. 다시는 여행을 할 때에 만오천 원, 이만 원 하는 호스텔에서 잘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주고 편안한 데서 잠을 자고,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가고, 특실을 가고 딱 이만큼의 효용을 사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때만이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만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바쁘고 알맹이 없는 시간들 속에 그때를 찾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간절했던 걸 이루고 나서의 허망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 가? 꿈은 꿈으로 두었을 때 더 아름다운 법이다.

그때는 지독하게 불편하고 싫었던 나날들이 그리운 것은 사람은 늘 결핍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너무 대단해 보이고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했던 것들이 살아가며 참 많았다. 지금 갖고 있지 않는 게 더 좋아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무엇이 소중한지를 모른 채 더 자극적이고 더 높은 것만을 쫓고 있어서 그렇다.

그때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 20살의 뜨거운 연애, 군대에서 느낀 첫 사회생활의 쓴맛, 자유를 느꼈던 첫 대학생활, 첫 해외여행•••. 막상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돌아가고 싶진 않으나 그리운 마음만은 아련히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진 못하니, 우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맞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걸 믿고, 허상을 쫓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받아들이기. 아무것도 없었던 20대에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있었듯 우리는 시간에 맞게 그저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의 효용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해 돌아본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누구나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성장하고 싶어 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시간도, 편리함도 모두 돈으로 사는 지금이 익숙해졌다. 시간의 효용 이전에 효용과 함께 나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지금 흐른 이 순간을 그저 받아들일 준비가 나는 아직 덜 된 것 같다.  

짐캐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으면 좋겠다.그러면 그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돈을 많이 벌고 성공도 못했지만, 어떤 의도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제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나의 3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KTX 울산역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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