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적 인생만이 살길이다
오랜만에 대학교에 간다. 업무상 볼일이 있어 가는 거라지만, 기분이 묘하다. 캠퍼스에만 들어오면 마치 군대처럼 사회와 단절된 이 안에서 만의 젊은 피가 끓는 느낌이다. 여기만의 와닿는 에너지가 있다.
학교가 왜 이렇게 조용한가 봤더니, 역시나. 시험기간이다. 대학에서 치르는 시험은 대개 교수님이 정해진 분량만큼 범위를 정해주고, 우리는 해당 부분만큼 얼마나 잘 외워서 들어가느냐 따라 성적은 A와 B, C로 나뉜다. 시험장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내 머리가 그 분량만큼을 더 잘 기억하고 있냐의 싸움이다. 적어도 인문계열이나 상경계열은 그렇다. 교수가 정해주고, 우리는 그 분량을 외우는 중간, 기말고사 시스템은 사실 캠퍼스를 나와도 똑같다. 왜 그런지 알려주겠다.
그때 시험을 함께 봤던 내 친구들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현재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공공기관, 대기업 사무직, 현장직,스타트업, 방송작가, 종류도 여러 가지다. 근데 이 모든직업의 본질이라는 것이 하는 일만 다를 뿐 정해진 일, R&R이 명확하다. 말 그대로 로봇처럼 연역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 대가가 단순히 돈이라고 하기엔 우린 어쩌면 지금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 감정의 영역은 배제하고, 시키는 것만 묵묵히 해내고 거기에 따라 성과평가를 받고, 인센티브를 받는다.:이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시험이랑 뭐가 다른가.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큰 정해진 틀에서 내려오는 연역추론이 아닌, 내 안의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게 공동체에서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취업을 하는 것도, 기사를 쓰는 것도, 현대인이 바쁘다고 얘기하는 대다수의 그럴싸한 변명이 되는 일들은 이런 연역적 추론이 기반이 된 일이다. 큰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차례로 내려와서 분업처럼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는 일들. 모든 직업이 그렇다. A가 정해져 있으면 나는 A-1을 하고 상사는 A-2, 팀장은 A-3•••계속 직급에 따라 살을 붙여나가는 개념이다. 결재도 다 똑같다. 결국 직렬이냐 병렬이냐 그 차이다. 이제 병렬의 예시를 들어볼까? 지금 난 아침 신문을 읽고 있다. 당장 이 신문을 쓰는 기자만 생각해도 그렇다. 이번엔 네가 이 기사 맡고, 내가 이 기사 맡고,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각자 한 사람씩 맡아 기사를 채웠기 때문에 그걸 짜깁기해서 지금 오늘자 한 편의 신문이 나온 것 아닌가.
근데 연역적 추론을 당연시 생각했던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도 사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귀납적 추론이 가능한 영역이 많다. 가령, 취업준비를 하는 대학생이 있다고 하자. 오늘은 이 회사 자기소개서를 쓰고, 오늘은 과제 하나를 하고, 또 다른 회사 면접준비를 한다고 하루 계획을 세웠다. 근데 그전에 내가 이걸 하기 위한 전체적인 나만의 생활 루틴이 자리해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자기 전에 오늘 하루의 일기를 쓴다거나, 아침에 달리기를 한다거나,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직무에 관심 있어하는지 어디에 적어 본다거나. 나도 취업준비를 할 때에 A4용지에 나에 대해 모든 걸 적어봤었다. 달리면서도 생각했다. 나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 오늘은 너무 숨이 차는데, 내일은 꼭 이 양재천 저 멀리 눈에 보이는 곳까지는 가봐야지' 나만의 작은 계획을 일상 속에서 세운 것이다.
이 작은 계획들이 모이고 모여 시간이 지나 결국 아침 운동 루틴이 만들어지고, 나를 알아가려고 빽빽이 적은 A4용지에서 자기소개서가 결국엔 써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연역적 삶에 파묻혀있는 우리는 정작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기반, 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귀납적인 행동들을 너무 무시하며 살아왔다.
전에 다닌 회사를 대입해 봐도 그렇다. 해외마케팅팀에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에는 이번 달 몇 박스가 팔렸고, 미국에는 몇 박스 팔렸고, 전년 동월 대비 얼마가 빠졌고, 얼마가 늘었고 우리는 그저 실적, 숫자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숫자로만 보고하고 정작 진짜 마케팅의 역할인 이 사람들이 불닭볶음면을 왜 좋아하지? 다른 데는 잘 안 팔리는 데 이 지역에는 왜 이렇게 잘 팔리지? 매출을 떠나 이에 대한 귀납적 추론이 아예 없었다. 그냥 홍보 좀 더하고, 계속 돈 들이붓고, 공장증설에 투자만 계속하는 거다. 그냥 회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정답에만 달려드는 꼭두각시인형인거다. 로봇도 이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시간에 사람 한 명 인터뷰 더 했어야 했다.
여행을 가도 똑같다. 예를 들어 올여름은 태국이 대세란다. 난 태국 관심도 없는데 그렇게 말해서 억지로 가면 그 여행이 재밌을까 과연? 내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여행 조사를 하고 준비를 해야 재밌겠지.
오늘 학교에 간 이유는 봉사동아리와의 미팅이 있어서다. 동아리 회장이 하는 말에 난 소름이 돋았다. 그 얘기를 듣고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는 거다. 내가 먼저 물어봤다.
“아무도 안 시키는 이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뭐야? 봉사점수? 성취감? 학점에 혹시 들어가? 아니면 졸업요건이야? “
그는 말했다.
“삶은 앞으로 더 삭막해질 거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질 것이고, 서로 간의 정이 사라질 것. 그 현실에 우리가 익숙해지기 전 지금 이 과도기에 내가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이 전개를 끊어내고 싶다”
고 소신발언을 했다. 이 나이 먹도록 이 대학생처럼 살지 못한 내가 부끄러우면서도 이게 진짜 귀납적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만 불짜리 회의였다. 왜 사람들이 워런버핏의 점심식사에 값어치를 매기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shit. 우린 고작 이만 오천 원 점심식사지만 25살 대학생과 한 시간의 회의 및 식사에서 난 인생을 배웠다.
연역적 인생과 귀납적 인생이 인간의 연륜에 따라 차이 난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데 이젠 알겠지? 아주 큰 착각이다. 인간의 조건과 숙성의 문제는 나이테랑은 단연 별개의 문제다. 25살도 저런 생각을 하고, 나이
40,50 먹고도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 앞가림 못하는 사람 널렸다.
결국은 귀납적 삶이 중요해질 것이고, 앞으로 내 것을 내가 직접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다. 세상의 정형화된 틀에서 나만의 것을 상품으로 내놓는 사람들.
빠니보틀도 유튜버 이제 추천 안 한다고 하지 않나. 하지마라 해도 할 사람들은 어떻게든 하거든.
영혼 없이 시키는 것 하고 돈 받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앞으로는 그게 진짜 본인의 업이 될 거다. 시키는 거 안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산다. 잘 봐라. 그리고 부러워하지말고 동경하지 말고 그게 우리가 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