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올해가 백일도 안 남은 지금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까. 떠나보낸 삼백일 가까운 기간 동안 적어도 내 머릿속에 있다는 건 좋든 싫든 어쨌든 ‘남아있는‘ 일 년의 결과물일 것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언제 난 행복하고 불행했는지를 스스로 물어본다. 어떻게 남은 올해를 행복한 순간으로 더 잡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을 마주하는 일은 늘 어색하고 쑥스럽다.
순간의 괴로움은 송곳이 되어 후벼 파 흉터가 돼 흉터로써 기억한다. 이는 예상했던 정량적 지표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 즉, 예상에 없던 가변성을 띠는 것에서 대개 생긴다. 맘대로 할 수 없는 관계라던가, 건강이라던가, 불의의 사고라던가. 내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올 수 없는 것들.
이에 비해 행복은 크기보다 적립하는 개념으로 가져갈때 더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국 빈도다. 행복한 삶이란 포인트 적립하듯이 일상에서의 소소함에 집중하는 저축성일 때 실현성이 높아진다. 가령, 일 년에 몇 번 없는 연봉인상이라던가, 생일이라던가, 상을 받는다거나, 청약에 당첨된다거나, 삶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당장 오늘 먹은 아이스크림, 어제 퇴근 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홀로 했던 산책, 사우나를 하고 나올 때의 개운함, 힘껏 달리고 나서 마시는 물한잔의 달콤함, 친구가 잘 됐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더 자주 있을 때 삶은 핑크빛 미래로 서서히 바뀐다. 그것이 내 주변의 것과 내 삶이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명징한 징표가 아닐까 한다.
이 세상 현대인은 서서히 이 논리를 알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주) 좋은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자기 객관화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영리하다.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한마디로 그냥 약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라도 높이기 위한 포장을 그럴싸하게 하는데 이럴수록 이 행복의 빈도수는 점점 더 짧아져 개개인은 매일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진짜 행복들 속 가짜행복이 자리하는 것이다. 마치 뽑기 게임에서 중간에 ‘꽝’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세상은 이 행복이 진짜 행복이 맞다고 종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 자녀가 중간, 기말고사에 백점을 맞으면 행복해하고, 아이는 부담에 점점 지쳐간다. 실은 이건 행복이 아니라 본인의 자아실현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그들의 욕심에 불과한 것을.
좀 더 비싼 브랜드의 옷과 시계와 안경을 차고, 외출 전거울을 보며 만족감을 얻는다. ‘자기 관리’라는 가짜 행복에 둘러싸인다. 사실은 온갖 치장으로 주변보다 본인이 낫다는 우월감과 과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속된 말로 뭣도 아닌 것들에 우린 행복이라는 포장지를 싼다. 그걸 선별하는 나만의 지혜가 미래의 더 질 높은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이 나만의 지혜는 쉽게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고, ‘행복’이란 건 결과론적 관점이라 지나고 나서야 그게 행복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 아침식사, 아내와 자기 전에 마시는 한잔의 따뜻한 티는 그 순간 당연한 편안함이라 받아들이고 행복인 줄 모른다. 이래서 순간의 행복을 끌어들이는 일은 여러모로 어렵다.
내년엔 올해의 무엇을 두고 가고, 무엇을 들고 갈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더 많은 걸 들고 가기 위해 남은 세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에도 큰 관심이 없다. 어떤 그럴싸한 물건이나, 일, 인간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나만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그 ‘홀로서기’의 정의는 앞서 말했듯, 흉터는 약을 발라새살이 돋게 관리하는 것 그리고 진짜 행복을 가려내는 통찰을 더 키워가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