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여행이 주는 미학
일본 후쿠오카에 막 도착했다. 일본은 올해만 두 번째다. 일 년 365일 중 어떻게든 혼자 국내든, 해외든 함께가 아닌 혼자 있는 시간을 꼭 가지려 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환경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걸 관찰하고 싶어서다. 그 관찰의 주체는 풍경도 아니고, 음식도 아니고, 다름 아닌 ‘사람’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몇 시간째 창밖을 바라보거나, 한 공간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옷차림만 봐도 ‘저 사람은 어떤 일을 하기에 저런 옷을 입고 있을까?’부터‘저 무뚝뚝한 표정에는 어떤 사연이 들어있을까?’ 만약언어가 통했던 지역에 갔을 때에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기에 저렇게 말을 할까?‘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펼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순간이 작게는 한 사물과 풍경에서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기른다고 믿는다.
퇴사를 하고 똑같이 출근길에 스타벅스 창밖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사람만 관찰한 적이 있다. 왜? 여행을 가면사진을 찍듯, 내 눈앞에 실재하는 사람들을 보고 프레임을 직접 설정해 그냥 기록해 보는 거다. 풍경화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내 눈에 실재하는 공간을 정하고 화가는 그 프레임 속 전체를 세세하게 놓치지 않고 그림을 그리듯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큰 범주는 동일하나 기록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작곡가는 그게 음표가 될 것이고, 화가는 그림이 될 것이며,작가는 글인 것이다.
그렇게 창밖을 보고 스타벅스에 앉아있게 되면 놀라운경험을 하게 된다. 장소는 스타벅스는 투썸이든 카페는 어디든 ‘창밖’에 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다.
단, 조건이 있는데 꼭 ‘본인이 늘 다녔던 곳’에 있는 곳이어야만 한다. 단 하루만 거기에 앉아보면 느낄 수 있다. 평소에 2년, 3년을 매일 똑같이 다니던 출근길이었는데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주차요원의 표정, 단정하고 정갈한 신입사원의 복장, 쓰레기더미는 언제 몇 시에 치워지며, 머리를 안 말리고 급하게 나오는 늦잠 잔 사람들,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는 주기, 그 짧은 텀을 못 참고 신호가 바뀌기 전 달려가는 성격 급한 사람들까지. 다 일상에 치여 못 보던 것들이다. 같은 공간이라도이렇게 관찰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건 그 자체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이렇게나 값지다.
남들이 보지 않는 걸 보고, 계속해서 여행을 가고, 다른책을 읽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걸 주입해 인풋을 늘려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고유명사 자체를 당연한 욕망이라 규정하고 우상화한다. 왜 시간이 날 때면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글을 쓰거나 새로운 걸 생산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멀리 떨어져 똑같은 장소라도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그뿐이다. 그 연습이 사실 가장 우선시되어야만이 여행을 가서도 보이지 않던 걸 볼 수 있고, 느끼지 못한 걸 느낄 수 있다.
내가 아는 많은 여행작가들은 여행을 가기 전에 이미 쓰고 싶은 글의 2/3 정도 써두고 간다. 김영하는 소설 <검은 꽃>을 쓰기 전 이미 멕시코, 과테말라에 가기 전반을 넘게 써두고 갔다. 꼭 그 정도 못썼다 하더라도 작기는 최소한 전체 개요는 잡아둔다. 가서 그냥 눈으로 확인하고 마침표만 찍는 셈이다. 소설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어딜 ‘떠냐야 만’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여행을위한 정당화 그 이상이하도 아닌 논리다.
내가 많이 다녔고 지금도 다닐 수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단지 새로운 걸 떠올리려는 게 아니다. 매일 보고 느끼던 것들이 스스로 맞다고 규정한 그 편협한 세계에 갇힐까 봐, 혹여나 늘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자체를 되살리기 위해 가는 것이다. 매일 보고 느끼던 것들이 나는 A라고 판단했는데, 혹시 B로 사는 사람들도 있지않을까. 그리고 현지에 가서 거의 확인만 한다.
물건이나 용역을 샀다면 그건 ‘검수’가 될 것이고, 면접을 보는 면접관이라면 이는 피평가자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고, 그게 작가라면 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생각과 확인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아니면 세상에 떠있는 무형의 것들을 글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의 이유도 있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그 사연을 당사자와 말하지 않아도, 조금이라도 유추하고 글로 꺼낼 수 있게 만들어보는 것이 어쩌면 결국 쓰는 사람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이런 게 연습이 되면 조금씩 실존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될 것이고, 그 상상력과 통찰력은 잠시 왔던 영감을 잡는 역할을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어떤 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그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 친구는 은행원이다. 이 친구는 창구에 손님이 오면 그 손님과 2~3분만 대화하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다 된단다. 반지를 끼고 있고 옷차림만 봐도 일단 기본적인 결혼유무와 직업이 판가름 나고, 대화에서 이 분이 현재 자산상태는 어떤지, 취미는 뭔지, 어떤 성격인지, 대략적으로 파악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소개팅을 하든 처음 보는 자리에서 바로 적용해서 사람의 파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은행원이라는 직업 안에서 교육을 받고, 손님을 대하는 직업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경험이 없어도 그걸 할 수 있는 역량을 저절로 갖추게 된다.
이렇게 기존의 것을 확장 및 확인하든, 세상에 없던걸 끄집어내어 무에서 유를 만들든 글을 쓰는 그 공통된 주체는 결국 내게서 ‘잃고 있던 걸’ 되찾는 값진 과정이다.
하루라도 안 쓰면 내 주변에 쓸모없고, 붕 떠있다 생각했던 걸 그렇게 자꾸 잃어가는 거다. 난 그걸 다시 찾으러 그렇게나 다녔고, 또다시 지금 이 곳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