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내 32년 인생은 힘든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기적이 오길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기적은 오지 않았다. 하긴, 로또라도 사야 기적이 일어나지. 그땐 로또 살 돈 5,000원도 없었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삶의 반복이었다. 인생사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은 존재하지만,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오나 늘 불평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좋았던 시절을 꼽으라면 잠을 잘 때였다. 그나마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의 부도로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큰아버지가 우리 집에 와 집 거실에 있는 도자기를 부셨다. 잘은 모른다. 그냥 추측컨대 돈을 빌렸는데 안 갚아서 그랬던 거겠지. 어린 마음에 그저 놀라 엄마 품에 울었던 기억만 난다.
그날 이후, 우리는 집을 팔고 나는 할머니 댁에서 2년을학교를 다녔다. 누나는 엄마, 아빠와 같이 원룸에서 지냈지만 나는 그러기 싫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어릴 적 연년생인 나와 누나를 엄마는 몸이 약해 둘을 모두 돌보기가 벅차셨을 것이다. 나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자주 맡기셨고 나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정이 갔다. 내 고집을 못 이긴 엄마는 2시간 거리의 할머니댁과 학교를 맨날 새벽마다 데리러 왔다. 그때의 나는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차 안에서 늘 내 인생을 속으로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매일 새벽마다 나를 데리러 오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운전대를 놓고 싶지 않았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같은 시간대 서있는 우리 엄마의 심정을 32살이 돼서야 헤아려본다.
할머니는 늘 아침마다 소고깃국을 해주셨다. 어떨 때는 저녁에도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소고깃국이다. 요리를 잘 못하는 엄마지만 그래서 소고깃국 하나는 그렇게 잘하시나 보다. 아빠가 국밥집을 차려도 될정도라 했으니.
주말이 되면 너무 심심했다. 할머니댁 근처는 진짜 시골이기에 아무것도 없었다. 논과 밭, 호수, 지저귀는 새, 할머니가 키우시는 닭 몇 마리, 상추가 끝이었다. 슈퍼에 가려면 20분을 걸어야 한다. 자연 속에 늘 과자를 사러 걸어 다녔다. 과자 하나 사는데 왕복 40분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늘 그 주변을 혼자 걸어 다녔다. 그때부터 나는 자연이 좋았다.
지금도 어디 놀러 가자고 여자친구에게 얘기하면 휴양림 같은 곳에 가자고 한다. 주변에 숲이 있고 조용한 곳에 가자고 한다. 금세 어두워지는 여자친구의 반응을 보면 활짝 웃는다. 못 이기는 척 롯데월드에도 가고, 사람 많은 석촌호수를 걸어본다.
21살, 이등병 때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기울었던 가세가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나 싶을 때 갑자기 하루아침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심하듯, 그때는 내가 신병 첫 휴가를 받은 아침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으로 슬퍼서 가슴이 물리적으로 아픈 경험을 했다. 심장이 조여오는 아픔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부대로 복귀하니 관심병사가 되어있었다. 선임은 하필 운도 없게 잘못 만나 뒤에 용이 3마리 그려져 있는 사람을 만났다. 아빠가 돌아가신 게 벼슬이냐며 밤마다 맞았다. 다음 날 중대장은 맞아서 불어 터진 내 얼굴을 보고 대대장이 보지 못하게 창고에 나를 숨겼다.
그렇게 군생활을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전까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찢어진 가난에도 단 한 번도 아빠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평생을 우리를 위해 사셨기 때문이다. 365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늘 막노동을 하시고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우리를 키우셨다. 그런 아빠가 한순간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상실감이 컸다.
그러다 새벽 불침번 근무를 하다 혼자 책 한 권을 읽었다. 김동영작가의 <나만 위로할 것>이었다. 화산이 분출한 아이슬란드에 갇혀 혼자 남아 스스로의 절대적인 외로움을 이기는 180일의 기록이었다. 대자연 속 홀로 남은 지구 북쪽 작은 섬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타인을 관찰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한 자신에게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답을 찾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그를 보면서 나도 불침번을 서는 새벽 4시에 생각했다.
지금 내 입술은 터져있고 아빠는 이 세상에 없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나에겐 엄마도 있고, 누나도 있고, 이루고 싶은 내 꿈이 있으니까. 나도 언젠가 내 글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 돼야지.
그렇게 난 2018년 아이슬란드에 왔다. 이곳은 모든 게 괜찮았다. 실수해도, 해고를 당해도, 잠시 쉬어가도, 혼자 있어도, 이루지 못해도, 무엇을 얻어가지 않아도,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무언가 서툴러도, 다 괜찮다. 다시 일어서면 된다고 그렇게 아이슬란드는 나를 위로했다.
인생은 수차례 시행착오를 동반한다. 늘 실패의 연속이었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어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관심병사에 몸은 허약했다. 미국에서 해고를 당했고, 멕시코에서 강도도 당해 2번 죽을 뻔했다. 목에 칼이 들어온 감촉을 느껴본 사람은 나 말고 많이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펄펄 끓는 열에 돈도 없고, 오늘 잘 곳이 없어 벤치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수능은 망쳐버렸다. 군대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맞았고, 토익시험은 20번을 쳤다. 서류는 300번 썼지만 입사 시험에는 늘 낙방했으며, 두 개의 회사에서 적응을 잘 못해 퇴사했고, 연말의 따뜻함과 화려함 속에 늘 나는 혼자였다. 혼자일 땐 주로 음악을 듣거나 책을 빌려 읽으며 외로움을 풀었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크나큰 자산이다.
영어학원 대신 미국,멕시코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외국어를 배웠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조금 일찍 성숙해졌다. 멕시코에서의 일로 위험한 곳은 가지 않으며 운동을 시작했고, 주로 집에서 혼술을 한다. 미국에서 벤치에 앉은 덕분에 바로 옆 델리집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나 집을 구해다 줬다. 수능을 망쳐서 서울에 안 갔고, 엄마 곁에서 더 오래 있어 따뜻하고 행복했다. 군대에서 죽을 만큼 맞은 아픔을 알아 누군가에게도 폭언과 폭행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돕는 게 좋다. 헌혈 35번, 조혈모세포 기증 신청을 했다. 토익시험을 하도 많이 쳐서 영어로 이메일 쓰기가 편하다. 마침내 300번 만에 나에게 기회를 준 회사가 나타났으며, 늘 혼자였던 내게 여자친구가 와 줬다. 음악을 자주 들어 미래의 아내와 콘서트를 갈 수 있는 취미가 있고, 책을 많이 읽어 다음 달에 내 첫 책을 출간한다.
온실 속의 화초와 길거리에 있는 잡초를 보아라. 어떤 것이 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는가? 온실 속의 화초는 몇 번이라도 햇빛을 안 쐬거나 물을 안 주면 바로 죽는다. 잡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흔들리나 끝까지 살아남는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자.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서툴다.
내가 하는 경험이 늘 옳다고 믿으며 살자. 삶의 이유를 찾으면 내 삶이 즐거워지고 강한 동기부여가 생기며 바른 길로 모든 일이 잘 풀린다.
나는 내가 가진 자산과 능력으로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슬픔을 알기에. 그래서 내 능력을 지금도 키우고 있다. 아는 것이 많아야 누군가를 가르칠 것이 아닌가.
오늘 힘들었던 한 주의 시작에서 지치고 힘든 누군가가 있다면 한번쯤 뒤를 돌아보자. 얼마나 멀리 잘 걸어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