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그리 Nov 19. 2024

자본주의에서 해야 할 일

비교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자본주의가 낳은 세상의 부조리함은 우리 각자의 삶의 격차를 생성해 왔다. 그 격차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보여지는 물질적인 것이 전부라고 믿는 것이 하나의 맹점이다. 그 물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바로 ‘빈부격차’다.

여행을 가더라도 누구는 가장 저렴한 날짜의 캡슐호텔에서 매트리스 같지도 않은 곳에 잠을 자면서 뻐근한 몸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누군 5성급 호텔에서 멋진 야경과 커피 한잔으로 여유롭게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의 질로만 따지면 매트리스의 편안함 정도일 뿐, 이 정서적 차이는 온갖 보여지는 5성급 호텔의 부대시설, 어메니티, 사용하지도 않은 욕조의 샤워밤 등으로 물질적인 차이를 극대화시킨다. 타인의 돈과 상응하는 가치로 교환된 이 물질적 객체는 사실 본인에겐 필요 없는 쓰레기라는 걸 알아채기까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실 객관적인 제삼자의 시각에서만 바라봐도 호텔의 등급차이와 여행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건 말도안 되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자 먼저 인생을 살아온 혜안을 가진 이들 혹은 반면교사를 위해 그렇게 살지 못해 후회스러운 사람의 의견을 듣곤 한다. 가장 가까이서 편안하게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그래서 최근 5년 어떻게 더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으며 자기 계발서가 붐이 일었던 적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자기 계발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뭘까. 바로 ‘비교’다. 비교하지 말란다. 자신과의 비교가 아닌 타인과의 비교. 결국 불행은 앞서 말한 이 비교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 인간이 하는 비교의 대상은 어떻게든 본인보다 더 낫거나 더 높은 곳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인과 그 대상을 동일선상에 놓는 순간 불행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근데 이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모든 단어의 맹점은 실제로 실천으로 옮기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의 판매권수와 비교의 늪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는 이들의 수는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작가들은 말을 조금만 더 변형해 다른 계발서를 내고, 머릿속에 이론적 지식을 넣기 위해 또 독자들은 그 책을 사고. 결국 출판업계와 작가만 배부르게 만드는 꼴이다.


이미 책이나 미디어로부터 노출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수는 옳지 않은 방식을 택한다. 본인보다 더 못한 이들을 보며 자기 위안 삼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잘나도 더 잘난 사람은 존재하고,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아프리카 난민이나 북한의 굶어 죽는 게 두려워 목숨을 거는 탈북민의 삶보다는 나은 법이니. 남의 불행을 온전히 본인의 위로를 위해 비교 삼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나, 굳이 그렇게 불평등의 극단적인 단면을 보지 않더라도 행복의 길은 여전히 존재하는 법이다.

어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사촌이 결혼을 해서 오랜만에 고향에 가 축의금을 받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축의금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서 잡담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남편이 현대자동차에 이번에 입사했대“

“글쎄, 합쳐서 연봉은 얼마래”

“신혼집은 작은 평수에서 시작할 거래”


이런 크게 영양가 없는 얘기 속에서 누구는 본인의 상황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안도의 웃음을 짓고, 또 누군가는 앞서 말했듯 본인이 더 낮은 곳에 있다고 판단해 질투와 시기 섞인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당사자에게 결혼이라는 경사에 대해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기보단 관례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와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 같아 보기 안쓰러웠다. 이처럼 비교는 일상 속에서 숱하게 겪을 수 있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비교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수월한 방법이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이를 없앨 수 있는 법은 이 현상자체에서 스스로 졸업하는 것이다. 어떻게? 본인이 옳다고 하는 것에 남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남들이 명문대를 가든,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든, 외제차를 뽑든, 눈과 귀를 닫고 내가 가진 것 혹은 내 목표만 생각하면 된다. 여행을 가더라도 4성급이나 5성급 호텔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길거리에 텐트 하나를 치고 자더라도 그게 본인의 가치에 부합하면 그게 낭만이다. 그 목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영역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교육에 있어서도 요즘 바뀌고 있는 추세가 돈 좀 있는 집안도 절대 자녀를 공부에만 목숨 걸게 만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 싶으면 본인이 원하는 것에 투자하게 해 주고 길을 터주려고 한다. 그게 돈을 버는 이유라 여긴다. 왜냐.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원하는 직업을 얻었다한들 본인처럼 평범하게 쳇바퀴 도는 삶만 살게 될 거거든. 심지어 이는 잘 풀린 케이스다. 설령 공부에 재능이 없는데 억지로 시켰다가 제일 애매하게 반에서 15~20등 정도 한다고 해보자. 꿈을 가지기에, 성장하기에 이만큼 애매한 게 없다. 1~2등은 가까운 미래에 공부로 전문직이나, 그에 맞는 사회에서 출세한 한자리를 차지할 거고, 꼴찌는 공부는 못하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그 시간에 다른 데 미쳐있는 본인만의 뭔가가 있다. 나중에 뭐라도 해서 먹고산다. 30대 내 주변 늘 꼴찌만 하고 공부 못했던 애들을 보면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산다. 포르쉐타는 친구도 있다.

본인보다 더 높은 잣대를 억지로 맞추려면 결국 가랑이가 찢어진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무리해서 얻으려는 건 늘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영끌족들 금리 좀 올렸다고 죽어나는 거 봐라. 심지어 그 결정이 본인의 온전한 결정이 아닌 타인을 의식한 것이라면 더더욱 의미 없다. 약점을 극복하는 것보다 그냥 본인을 돌아보며 더 빛나는 걸 강화시키는 게 이 자본주의에서는 훨씬 가성비가 좋다.


본인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비교문화 그늘 아래서 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본인이 100%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일부 순응하라고 하는 건 내게 맞는 의식주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당당해지는 것. 그 외에 소극적으로 반대의 표시를 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를 졸업하는 법뿐이다. 1부터 10까지 자본주의에서 숫자로 정률적 평가가 가능한 모든 것에서 0을 자처하는 것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 표시하고 싶은 날에도 돈의 액수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다른 세심하고 헌신적인 본인만의 표시를 하는 거랄까.

주말에 롯데 잠실타워 가봐라. 모든 남자들이 꽃다발이랑 샤넬가방 들고 체크인 기다린다. 다 프러포즈를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가보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돈의 액수에 우위가 결정되어 최상위 포식자가 되는 것보다 실제로 그게 훨씬 삶의 큰 만족감을 선사한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되고, 매일아침 마음 한편이 보험을 든 것처럼 든든하고 편해진다. 편안하고 정갈한 똑같은 옷을 다섯 벌 가지고 있으면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제일 편한 건 본인인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이 용감한 졸업을 스스로 자처해 보는 건 어떨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