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법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살다가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유대인 수용소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말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여기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다
어떻게 된 걸까.
"이번엔 나갈 수 있을 거야. 올해는 꼭 나가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여생을 보낼 거야"
"이번에 나가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좀 더 재밌게 살아봐야지"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열심히 해서 모범수가 되면, 빨리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부푼 희망을 갖고 불확실한 미래에 배팅한 사람들은 그 목표 하나가 무너져 내릴 때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본인의 삶을 놓게 되는 것이다. 왜냐고? 본인의 전부를 잃었거든. 내가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더 나은 내일이 가져다주는 희망이었는데 그게 사라졌으니 내일 숨이 붙어있다한들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비장한 목표가 있는 사람들을 우러러본다. 그리고 본인도 그런 큰 꿈을 가져야만 현실적으로 거기에 반에 반 정도의 꿈을 실현하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배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누군가 꿈을 물으면 관심도 없는 의사, 대통령, 판사, 검사가 나오는 게 그 이유다. 요즘은 한글을 갓 뗀 아기들도 '의사'라는 단어는 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주입을 시켰다는 말로밖에 해석이 안된다. 우린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수히 많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적어도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은 원룸에 살아도,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갖고 돈을 꼬박 저축하면 강남아파트까진 아니더라도 발 뻗고 잘 수 있는 온전한 내집하나는 가질 수 있겠다는 그런 희망.
이런 소시민적 희망조차 버거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그 반이라도 가지고자 더 처절하게 큰 목표와 꿈을 추종한다. 본인이 과거에 특정한 결핍이 있는 경우엔 더하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이었다면 그 친구는 자연스럽게 커가면서 '돈'을 많이 모아서 성공해야겠다는 목표만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는 주식이나, 부동산에 목맨다. 정작 본인의 삶에 중요한 그 무언가는 뒷전이고. 부모의 사랑에 결핍이 있는 친구라면 10대, 20대부터 본인의 연애관은 사랑을 갈구하는 쪽으로 기운다. 어떻게든 본인은 사랑을 받고 싶고, 이기적일 정도로 상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강요한다. 본인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다. 그러다 인생에서 어떤 큰 문제가 생겨, 그꿈이 날아가버린다면? 사랑을 더 이상 못 받는다면? 애인과 헤어졌거나, 이혼을 했거나, 주식으로 전재산을 잃었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그럼 그 친구는 삶이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는 길로 가 버린다. 목표라는 가면을 쓴 맹목적 추종은 외적변수에 의해 어느 한순간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 목표가 철옹성처럼 단단하다고 생각한 건 자기 객관화가 결여된 본인의 허망한 착각이었다.
자, 이제 앞선 예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말해주겠다. 실제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1. 그냥 하루하루 버티자, 어차피 난 여기서 못 나갈 건데. 죽을 때까지 버티는 거야~
2. 이 안에서 나는 어떤 최소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이 안에서 행복은 아닐지언정 최대한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3. 종교의 힘이 날 여기서 버티게 만들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덤덤하게 성경이나 읽자. 배고프고 괴롭고, 아파도 그냥 성경이나 읽자.
4. 난 어차피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간다. 100% 확신한다. 불가능하니 그냥 여기서 내 멋대로 살아보자. 재밌게.
이런 사람들이 전원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해 각자만의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감옥밖에서 찾았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인사이트는 뭘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블로그 제목이 떠오른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타이슨도 말한다. 누구나 처맞기 전까지 계획은 있다고. 외적변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다이어리에 계획을 세우고, 매일 본인은 된다고, 꿈을 이뤄 부자가 될거라고 자기암시한들, 올해는 달라지자며 매년 새해목표를 수정한들, 동기부여 백날 한들, 그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게 어쩌면 본인에게는 또다른 압박과 불행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 지금 본인이 가지는 스트레스, 걱정도 본인이 원했던 목표와 현실 간의 괴리감에서 다 발생하는 것들이다. 현대인의 대부분 70% 이상의 고민이 그렇다.
예를 들어보자. 직장에서 승진을 기대했는데 승진이 누락됐다거나, 이번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을 수 있을것 같았는데 70점 밖에 안된다거나, 올 연말까진 1억을 꼭 모으려 했는데 부모님이 갑자기 아파 8천만 원밖에 못 모았거나, 부수입을 만들고자 주식을 시작했는데 트럼프의 관세전쟁으로 수익률이 -30%거나. 운동을 시작해 다이어트를 하려 했는데 오히려 운동 때문에 다쳐서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거나, 올해는 꼭 취업에 성공하고자 버텼는데 올해도 다 떨어지고 취준생으로 남았다거나, 삶이 다 이런 식이다. 현실과 각자가 가진 이상과의 괴리감이 스트레스와 근심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본인에 대한 믿음과 이미 벌어진 외적변수는 전혀 별개의 독립적인 단어다. 본인의 노력과 재능이 부족해서 그 변수가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왔을까? 그냥 온 거다 본인에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삶이 다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말한다.
간절히 바라는 게 있는가? 올해 안까지 꼭 이뤄야 할 무언가가 있는가? 그 꿈을 간절히 바랄수록 그 성취에 대한 노력과 동시에 그 결과가 원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이겨낼 최소한의 역치가 필요하다.
그걸 알아야 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을 미리 사서 하는 건 어리석으나, 아예 변수를 생각지도 않고 시작하는 건 더 어리석고 일천하다. 이게 두려우면 본인의 환경과 상황에 버거운 목표와 꿈 자체는 가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 그렇다면 매사에 어떤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 아침을 맞이해야 할까. 오늘 목요일 아침은 그럼 어떤 생각으로 알차게 보낼까를 고심해야 할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이유자체를 적립식 개념보다 행복의 지속적소비를 통한 분출에 조금 더 초점을 두면 된다. 계속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더 목표에 (의도치 않게)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덤덤하게 어떤 것에 과하게 동조하지 않고,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쾌감과 성취만으로 충만함을 느끼는 것.
목표나 꿈을 아예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긍정을 소비하는 것이다. 취업준비생을 가정해 보자.
"아, 올해 취업 안 돼도 난 괜찮아. 그냥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잖아?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했을 뿐이야. 그래도 인생은 계속 돼. 내일은 무조건 또 와"
와 같은 식이다. 좀 더 극단적인 다른 예시를 보자.
"내가 지금 느끼는 지옥 같은 하루와 고통은 취업될 때까지 지속된다. 아니, 취업해도 그렇다. 그냥 이게 디폴트다"
라고 생각하면 “어차피 이 고통은 계속될 텐데 나 스스로 괴로워할 바에 이 악조건에서 조금 더 행복해보지 뭐"와 같은 마음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거다.
살아내는 건 의외로 꽤 단순하다. 그냥 하는 거다. 내가길을 만들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냥 이 길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길로 향하면서 각자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거다. 마인드만 건강하면 어떻게든 이렇게 다 살아진다. 단순함이 행복이다.
3개월 뒤? 6개월 뒤? 일 년 뒤? 그런 거 없다. 오늘을 그냥 살자. 무던하고 그리고 성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