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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삶의 파고는 곧 평정임을

영화 <로마> 리뷰

by 홍그리

'평온하고 고요함. 또는 그런 상태'. 이 풀이의 단어는 평정이다. 평정이라는 단어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내 곁에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이 평정심은 평온한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고 해서 마냥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정확히는 평정과 대비되는 하나의 일탈적 사건이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대개는 부정적인) 상반된 계기가 있을 때에 그 존재가 부각된다. 가령, 일-집, 일-집 퇴근을 반복하는 지루한 직장인의 일상이라던가, 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강아지를 산책하고 가족끼리 저녁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학생이라던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일상 가운데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 누군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었다거나, 가족중 누군가를 평생 병시중을 들어야 한다거나, 건강이 악화된다거나, 본인이 다쳤다거나 이 소중하지만 지루한 일상을 깨트릴만한 결정적 사건이 존재할 때에만 이 평정심의 소중함을 직시한다. 사람은 이토록 간사하거든. 하지만 이 영화는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할 이 메커니즘을 깨부순다. 각자의 인생에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그 파도 자체를 들여다보라고 감독은 넌지시 얘기한다. 파도의 높낮이 삶의 파고 자체가 평정이라고. 그렇게 한없이 무너지면서, 잃어가면서 내면 속 조용한 초인적인 힘과 에너지가 그 삶 자체를 평화와 안식으로 이끌어준다고.


영화의 엔딩에는 클레오가 수영을 못하면서 깊은 파도를 헤쳐나가며 아이들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영을 해본 적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할 힘도 없는 클레오는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격랑기, 야만과 격변의 시대애 힘없는 이들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해내지 않나. 끝내 아이들을 구하고, 본인의 평정을 이끌어줄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 마지막 빨래를 너는 클레오가 하늘을 바라볼 때에 옆에 작은 글씨의 ‘para libo'는 감독의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줬던 가정부에게 바치는 메시지다. 이 영화를 그녀에게 바친다는 것. 이처럼, 주인이 맨날 밟아대는 개똥처럼 바닥에 흩뿌려지고 밟힌 인간의 존엄을 끝내 지켜내 하늘로 승화시킨 클레오를 바라보는 감독의 존경과 경외심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그의 어린 시절 가정부를 존경하고 있다.


1970년대 멕시코. 정치적 격변의 시기 한 중산층의 집에는 분에 넘치는 자동차와 가족을 경시하는 한 가장이 있다. 그 가정의 가정부가 클레오다. 그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임신사실을 알고 도망간다. 가장도 마찬가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집에는 거짓말을 한채 도망가고 여자들은 홀로 남는다. 아내는 가정부 클레오에게 술을 한잔 마시고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여자는 어떻게든 늘 혼자야.


클레오는 그를 찾아가 임신사실을 알렸지만, 본인의 자식이 아니라고 시치미 때며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소리지른다. 끝내 양수가 터져 출산과 동시에 죽은 아이를 마주하는 클레오. 아이도 죽었고, 남자친구도 떠나갔지만 절망에 빠지기는 이르다. 남편과 이혼한 아내는 클레오를 끝까지 챙기며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키워낸다.


마지막 함께 떠난 휴가날, 거센 파도에서 아이들을 구하고 본인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클레오는 마침내 울부짖는다. 힘과 권력이 세상을 지배할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두 여자의 초인적인 삶의 책임감은 대중들에게 큰 깨달음을 안긴다. 감독은 이렇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시선에서 예상치도 못한 원석을 뽑아내 스크린을 통해 대중을 감동시킨다. 그 원석이란 뭘까. 삶에서 권력과 스포트라이트, 명예와 부는 부수적인 것이며, 가장 작고 당연한 것이 갖추어질 때에 삶의 안정과 평안이 찾아온다는 메시지. 감독은 단순히 소중한 기억을 꺼내어보고 본인의 어린시절 가정부 리보를 추억하려는 의도를 넘어 그녀를 향한 깊은 경외심을 이 영화를 통해 나타내려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적은 가히 처음일정도로 클레오의 어투, 아이들의 낭만, 이혼당한 아내의 고뇌, 권력에 눈이 멀어 약한 걸 경시하는 남자들의 비겁함이 고스란히 스크린을 통해 전해져서 감동의 깊이와 울림이 더 크다.


우리는 잘난 사람들이 부럽다. 질투 난다. 나보다 하나라도 더 가지고, 더 큰집,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면 한없이 작아질 때가 있다. 그리고 어느새 작아져버린 본인에게 되묻는다.


나 잘 살고 있는게 맞는걸까?


이 영화의 배경처럼 격변의 시기 끝 쟁취한 전 세계가 마주한 현재 자본주의는 인간의 허영과 욕심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경제체제다.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더 가져야 하고, 타인과의 격차를 벌려야 하며, 거기서 희열을 느끼도록 시스템이 짜여있다. 그래서 기업은 매일같이 편리함이라는 가면을 씌워 물건을 양산하고, 소비자로 하여금 돈을 쓰게하며, 정부는 돈을 풀어 돈의 위대함을 알린다. 더 돈에 매몰되도록. 자, 그 반대는 어떨까.

없는 사람은 빈곤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 가치가 훼손될 정도로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이 영화에서도 개똥이 나오는데, 개똥은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나 딱 그 집안의 가장 한 사람만 싫증을 내고 짜증을 낸다. 자본주의는 마치 영화의 개똥같은 그런 것이다. 돈을 가진 사람에겐 돈만 보이고, 돈에 가려진 더 값진 걸 찾는 사람에겐 또 다른 큰 세상이 열린다. 감독은 각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 그리고 본인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보듬어주는 최소한의 연대가 지켜진 상태에서 책임감이 부여될 때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메시지로 대중들에게 공감을 구하는듯 하다. 뱃속의 아기는 죽은 채 태어나고, 직업도 가정부에다가, 사회적 약자인 여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클레오가 수영도 못하면서 파도를 헤치고 같이 사는 아내의 아이들을 구하러 가는 장면은 돈과 권력에 홀린 듯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게 아니라, 그냥 내 삶 자체를 책임감 갖고 살아가는 자체가 올바른 삶이라고. 그게 곧 평정이라고. 클레오에게 이런 시련, 파도의 거센 파고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평생 삶의 가치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하루살이 인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평범하게 출산을 해, 누군가의 밑에서 어찌저찌 아이를 키워내며 부족하게 살아갔을지 모른다. 상처와 흉터가 남긴 연대, 그리고 사랑이 반복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한 인간이 마주하는 평정심의 거의 최선이다. 내가 경험한 배경에, 언어에서 역사적 사건을 조명하고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내겐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다.

멕시코는 가족중심문화를 띤다. 비즈니스적 만남에서도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자녀가 몇 명인지, 부모님의 건강은 어떠신지를 먼저 챙긴다. 그것이 곧 상대에 대한 예의이며 존경의 표시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에도 가장 먼저 한 명 한 명, 가족을 소개해주는 것이 익숙한 풍경. 1인가구가 더 익숙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 오로지 혼자로써 존재하는 청년이 각자의 자리에서 내 책임을 온전히 다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한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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