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을 모르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쫓는답시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언가를 늘 써왔다. 주변에 10명이 있으면 10개의 삶이 있고한국은 5200만 개의 삶, 전 세계에는 100억 개가 넘는 삶이 자리할 테지. 그 와중에 더 나은 삶, 더 잘 사는 방법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은 그들 각자의 기준에 충족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그 정답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 생각만을 드러내는 이곳에서 특정한 글에 좀 더 범용적이고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한다 해서 그것이 정답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정답을 찾는 중이다.
우린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누구는 돈이 많은데 성격이 거지 같고, 누구는 경제적 결핍을 겪어 힘들게 살아와 성실함이 있지만 본인밖에 모른다. 어떤 이는 자상하지만 경제관념이 없고, 누구는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졌지만 가정이 위태롭다. 이 모든 건 본인의 대화에서든, 글이든, 영상이든, 어떤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혹은 타인이 눈치챈다. 심지어 요즘은 자기 PR시대라 해서, 모두가 생각하는 이 결함조차 크게 숨기지 않고 왠지 모르게 당당하다.
어떤 이는 돈을 이야기하고, 돈이 많아야만이 본인의 삶, 가족, 앞으로의 미래를 충분히 보장받는다고 여긴다. 자비, 배려, 존중, 공감 따위는 결여되어 오직 돈과 본인 업의 성장만 쫓는다. 자, 설령 본인처럼 돈만을 쫓는 반려자를 만났다 하자. 그럼 본인이 원하는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 수도 없고, 그 가족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또 다른 누구는 성격은 자상하고 가정적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어 가족전체가 힘들어한다. 회사에서 잘리고 앞으로의 노후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들의 롤모델은 당연히 본인의 현재에서의 가장 큰 결핍을 소유한 이가 될 것이고, 서로는 서로의 이상향 즉, 롤모델에 공감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삶에 대한 정답이 없었기에 어쩌면 더 얘기하기가 편했을지 모른다. 나보다 잘난 ‘너’와의 비교도 제삼자가봤을 땐 관심조차 없는 일련의 해프닝일지도.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건 다른 세계의 비교에 가 있거든. 각자가 가진 게 다 다르니, 우리는 본인이 가진 것에서의 공통적 준거집단을 만들어 그곳에서 우열을 가린들 사실다른 준거집단은 관심조차 없다는 거다.
자, 그러면 정답도 없고 각자의 목표만 쫓는 이 삶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법은 뭘까. 결국 내가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의 본질은 시야의 확장과 현재로서의 만족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앞선다.
작다. 너무 작다. 내가 가진 이 공간과 생각들이. 조금 더 넓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겪어보지 못한 지식,경험을 늘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움 자체에, 사고가 확장되는 것 자체에서의 희열과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또 한국인 종특의 무언가를 꼭 배워야만 하고, 증거를 남겨야 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고,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건 사실상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격증을 공부하는 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서 찾는 일이 아니다. 자격증은 어떤 날짜에 있을 자격시험을 꼭 '합격'해야만 한다는 목표에서 주어지는 수동적인 행위다. 고3 수험생들 중 누가 오늘 같은 이 폭염에 또 어제처럼 일어나 어제와 똑같은 지루한 일상 속 스터디카페를 전전하면서 공부하는 걸 즐기겠는가.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거지.
직장인이 누가 퇴근하고 공부하고 싶겠나? 승진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단기목표 때문에 하는 거지.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 사람은 여기에 관심이 많구나. 이것도 재밌겠다"
"돈이 많아도 꼭 행복한 건 아니구나. 좋은 직장, 전문직에, 한국사회가 인정하는 무언가를 꼭 가지고 있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막 특출 난 게 없는데도 가정 화목하고 건강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사는 것도 참 재밌어 보인다"
시야의 확장에는 결국 이런 생각들이 자리하는데, 이 세계관의 확장 끝에 오는 것이 바로 '만족'이다. ‘최고의 부자가 되겠다’.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되겠다.’
‘내 분야에서 최고를 한번 찍어보겠다.’ ‘회사에서 임원까지 무조건 올라갈 거다.’와 같은 현실과 대비되는
(대부분이 최고라고 일컫는) 부와 명예 같은 물질적인 것이 최종목표에 도달하면 결국 그게 본인이 생각하는기간 안에 되지 못했을 때 그 삶은 실패로 끝난다. 타인의 위로 속에서도 본인은 불행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설령 본인이 원했던 그 목표에 다 왔다 하더라도 변수는 여럿 상존하기 마련. 그 사이 진짜 소중한 걸포기하면서 놓쳤을 수도 있고, 그 기간이 너무 늦게 와 다른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을지도, 설령 이뤘는데 갑자기 거대한 공허가 그를 감쌀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계관을 조금씩 넓혀가는 그 과정에서 만족이 따라온다면 예적금처럼 절대 잃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말 그대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지금에 만족하고, 내가 가진 것, 이룬 것에 감사하면서 그 외적으로 조금씩 무엇을 새로 배우든, 계획을 세우든, 도전을 하든, 내 삶을 확장시켜 보는 것. 만족의 기준이 나보다 못한 사람 즉, (본인이 생각하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위안 삼아 우위를 느끼는 경우만 제외한다면 그 삶은 그 자체로 진짜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
내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한국사회는 이런 발상이 결여를 넘어 소멸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젠정답을 알아가니 스스로 실천할 때다. 그리고 타인에게 솔선수범을 먼저 보일 때다. 어차피 사람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욕심은 키울수록 해가 된다는 걸 이제 안다. 수직적인 공직사회, 관료제, 회사생활 속 찌든 우리 개개인은 개인의 취향과 개성은 아예 잃어버린 지 오래. 직장상사나 타인의 규칙에 얽매여 본인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한다. 그저 남 눈치 보면서 시선신경 쓰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뾰족 튀어나온 개성을 하나 둘 둥글게 뭉개버린다. 그렇게 무지개색이 회색이 된다.
구설수는 내가 뭘 하든 언제 어떤 순간이든 나를 따라올 것이다. 내가 주식으로 얼마를 벌든, 망하든, 퇴사를하든, 살이 쪘든, 헤어졌든, 다쳤든, 사업에 성공했든 그 어떤 순간에도. 대개 안 좋은 쪽엔 더 많은 단어들이붙겠지. 그게 더 재밌으니까. 남이 못되어야만 내가 빛나고 내 위치가 유지되니까. 간사한 인간의 본능이다.
근데 우리 딱 하나만 기억하자. 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 그 구설수를 위해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까운가. 거기에 휘둘려 고치고, 피드백에 좌절하고 또 개선하고 하다가 인생 끝나면 얼마나 허무하고 후회가 막심할까. 심지어 늘 변하고 정답도 아닌 그 연기 같은 것에.
내 행복, 내 가족의 행복, 내가 사랑하는 것에 행복만 갖춰진다면 인생은 그야말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건 어디서? 내가 얼마나 지금을 만족하는지에 달렸다. 만족이 좀 덜하다면 열심히 살면서 돈 벌고, 노력하면 된다. 세상에 돈벌거 천지다. 그냥 내가 어느 순간이와야 만족하는지는 적어도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거다.
오늘 집을 나설 때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전반적인삶에 지금 만족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