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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안 하고 재밌게 사는 법

페르소나(persona)에 대하여

by 홍그리
It‘s not a big deal


요즘 주변인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의 대개 모든 결론은 이렇게 끝난다. 누구 뒷담화 같은 가벼운 고민부터 앓고 있는 고민, 진로, 결혼, 연애 같은 무거운 얘기들도 결국 당일 자기 전에는 별일 아니게 느껴지고, 다음날 일어나면 이 얘기를 한지도 까먹은 채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어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


어쨌거나 부정적인 어떤 일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흘려보낼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이 조금은 되고 있다는점은 꽤 고무적이다. 그중에서 최근의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에 대해 말해보겠다. 지인의 회사근속기간에 관한 얘기였다. 지인은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인데, 27살이다.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다니는데, 정년이 60살이라고 치면 앞으로 회사를 33년이나 더 다녀야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라고 한다. 심지어 그때는 정년연장도 100% 될 것이니 최소 35년은 잡아야겠다.

막내가 회사에서 이런 당찬 얘기를 하다니. 회사를 한 번이라도 다녀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가 말하고 난 뒤 이 분위기의 적막함은 본인만 모른다.


자, 그가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단지 그렇게만 말하면 경쟁이 판치는 자본주의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이 직장을 얻은 본인은 부러움의 대상이며, 질투와 시기의 표적이 되겠지. 근데 아무리 좋은 직장에 다닌 들, 백만장자인들, 유명한 인플루언서, 연예인인들 각자의우주 속에 빠져 살기 때문에 작은 고충은 하나씩은 다 가지고 산다. 돈과 물질적인 것이 행복도와 정비례한다면 재벌가 혹은 연예인이 자살을 하는 뉴스 1면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 근데 우리는 꽤나 흔하게 보고 있다. 이 삶을 살아가는 모두는 내가 겪는 고민과 문제가 제일 힘들고 고되다. 힘든 건 내가 제일 힘든 것 같고, 편하고 좋아 보이는 건 다 남이 하는 것 같다. 원래 인간은 일천하고 간사하니까. 이걸 전제로 깔고 간다면 그 신입사원의 고민은 귀엽게 봐줄 만한 것.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는 33년을 얘기할 때 본인이 이때껏 태어나 살아온 기간보다도 6년이나 더 많은 시간을 이 회사를 위해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고민을 듣다가 그때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삶에 대입해 본다. 아무리 좋은 회사에 입사한들, 회사에만 좋은 아무런 의미 없는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인생 33년을 더 허비해야 한다니. 뭐가 됐든 비효율적인 건 확실하다. 아니, 설령 비효율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더 효율적인 방법이 무조건 있는 건 틀림없다.


근데 이 고민에, "그래 너 말이 맞아. 적당히 다니다 퇴사하고 돈을 저축해서 너 갈길을 찾아"

라고 말해버리면 이 세상 만 60세 존경받아야 마땅할 정년퇴직하신 모든 은퇴자들의 삶을 부정하는 격이다.그들에게 이 친구의 고민은 한낱 무례한 추임새에 불과하다. 한 직장에서 꾸준히 내 가족을 위해 혹은 본인의 미래를 위해 몇십 년을 바쳤다는 건 이 세상 가장 값진 일 중에 하나일 것이 틀림없다. 왜냐고? 회사를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매일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무언가 본인만의 지키고 싶은 게 있기에 오늘 하루도 출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뿐이다. 그럼 전국에 있는 약 2천만 명의 직장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끔찍하리만큼 지루하고 고된 하루를 견뎌낼까. 아니 가장 견디기 쉬운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다. 여러 페르소나를 한번 만들어보라고.


나란 사람은 한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 역할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들, 딸, 직장에서는 대리나 과장 그리고 친구, 동생, 누나, 형이다. 어떨 때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또 어떨 때에는 극존칭으로 불리기도, 누군가는 나를 하대하기도 한다.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나'라는 페르소나는 이렇게나 다르게 분류된다.

자식이 있고 가정을 책임지는 아빠 역할을 맡았다면 꽤나 듬직한 모습, 의지되는 모습, 언제나 기댈 수 있는가장의 페르소나를 장착해야 한다. 직장에서 ‘과장’ 역할을 맡았다면 집에서는 장난꾸러기에 덤벙댄다 하더라도,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선배나 팀장한테 믿음직하며 후배에게는 존경받는 그런 페르소나를 장착해야 한다. 출근하면서 그들은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표정과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변신을 해야 그런 자세가 나온다. 반면, 친한 친구 역할을 맡으면 완전 풀어져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편하게 술 한잔을 건네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때와 장소에 맞는 역할, 그 역할에 요구되는 페르소나가 얼마나 적절한지에 따라 내가얻을 수 있는 득과 실이 가려진다. 그럼 더 많은 득을 가지고 오기 위해 어떤 페르소나를 더 많이 내게 장착해야 할까. 어떤 가면을 내 삶에서 더 많이 써야 할까.

나의 진짜 페르소나 즉, 나를 대표할 수 있는 페르소나는 대체 뭘까. 하루 중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니까 ‘과장’의 역할이 나를 나타낼까, 아니면 직장보다는 가족이 훨씬 더 소중하니까 듬직한 ‘아빠’ 역할을 한페르소나에 집중해야 할까. 아쉽게도 둘 다 틀렸다. 이모든 페르소나가 나 자신을 대변한다. 내가 드러낸 이 모든 페르소나에서 내 이름이 불린다. 나는 그냥 그 모든 페르소나가 합쳐진 결과물이다.


자, 그러면 답이 나온다. 회사를 30년이나 더 다녀야 해서 숨 막힌다는 이 지인의 고민의 해결책은 뭘까. 극단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삶을 찾아갈까? 미친 짓이다. 요즘같이 극악의 취업난에 자영업자 폐업하고, 경제가 박살 나서 소비쿠폰이나 뿌리고 있는 판국에 퍽도 잘 살겠다. 사업성공은 개뿔, 어디 손가락이나 안 빨고 있으면 다행이다. 당연히 이 못나고 부족한 나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는 고마운 존재이며 계속 끝까지 다녀야 한다. 정년퇴직까지. 어떻게 힘들게 들어온 정년보장이 되는 회산데 인마.

정답은 그 생각이 나지 않도록이 아닌, '덜' 나도록 나만의 페르소나를 몇 개 더 가져가보는 것이다. 아빠, 과장님, 친구에만 국한됐던 내 페르소나를 좀 더 넓혀보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새로운 페르소나에 몰입을 하게 되고, 이 새 몰입이 내 삶을 더 재밌게 만든다. 재미를 떠나 가능성이나, 운의 영역에서도 훨씬 범위가 확장된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예정에 없던 또 다른 꿈이라는 게 생길 수도. 인생의 어떤 특정한 사건은 계획이 아니라 갑자기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게 찾아오기 전까진 계속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면 된다.


어떤 다른 곳에 빠져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 가장 가까운 지인은 이 페르소나를 몇십 개까지 확장해 그중 가장 본인을 잘 나타내는 페르소나를 골라 사업을 해 현재 스타트업 시리즈 A까지 키워 대기업에서 투자를 받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매사에 관심이 많고, 남들이 하는 건 어떻게든 다 사보고, 가져보고, 가보고,배우던 친구였다. 이처럼 삶을 더 다이내믹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은 페르소나를 넓혀가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어차피 이 모든 페르소나가 나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 페르소나가 더 많다면 타인이 바라보는 나 자신도 다채롭고 매력 있고 호기심이 들 수 있지 않을까.


27살 지인이 이 고민을 털어놓는 와중 그 순간에도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누군가는 30년 넘는 회사생활을 재밌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후회 없이 개운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인의 페르소나 중 하나였고 그걸 잘 살린 케이스겠지. 나는 어떤 새로운 것에 몰입할 수 있고, 오늘 어떤 새로운 것에 또 도전해 볼 수 있을까.


매일 아침에 습관처럼 먹는 이 이천 사백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치우고, 오늘은 사백 원 더 주고 라떼를 한번 먹어봐야겠다. 혹시 아나, 내가 라떼에 빠져서 바리스타라도 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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