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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의 인사 찬반논란

지하철 에피소드로 보는 세상

by 홍그리

지하철을 타다가 한강변을 지날 때면 기관사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오늘 하루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노을 지는 모습 보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걱정거리, 스트레스는 이 지하철에 두고 가세요”


직접 들은 위로의 메시지는 이거다. 하지만 요즘은 더 색다르고 참신하게 기관사분들이 고객을 위해 지친 삶에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남긴다고 한다. 그 메시지를 듣는 순간의 나는 에어팟을 귀에 끼고 있었는데, 잠깐 일시정지를 누르고 귀담아듣다가 그 멘트를 다 들을 때쯤엔 가벼운 미소가 절로 나는 순간이었다. 언제 한 번은 또 한강변을 지날 때 안 해주실 때면 ‘왜 오늘은 안 해주실까?’ 하는 심심한 아쉬움이 자리하기도 했다.그런데 요즘 서울교통공사에 위 사례와 관련해 이 멘트를 중지해 달라고 민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몇몇 사람이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대개 민원내용은 이런 식이다.


“그 말 때문에 제 삶이 더 비참해졌어요”

“집에 가는 순간만큼은 조용히 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위로 바란 적 없어요. 어딘지나 정확히 알려주세요”


민원 넣은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이 사회를 불평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런 민원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우리네 삶 자체가 지나치게 팍팍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 없고, 개인주의적에다,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조금이라도 피해보지 않으려 본인이 가진 권리에서의 최대를 누리려고 하는모습이 보인다. 그 권리를 최대한 효용적으로 사용한다는 건, 본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하나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무례한지 모르고 과하게 덤벼드는 것에 어폐가 있다.

물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면 누군가는 위로보다는 현재 지하철의 위치가 어떤 역인지 알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럴 시간에 고객안전에 더 큰 노력을 쏟는 게 정당하다고 보는 시선도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위로 메시지의 취지자체는 대상이 고객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를 이롭게 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대답의 기대치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그들을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냥 이런 민원이 많은 현실 자체가 적적하고 개탄스럽다.


대개 이런 이유는 혐오와 분노에서 기인한다. 혐오와 분노에 점철된 사회는 어떻게든 본인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적자생존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거기에 좀 더 과몰입하거나 매몰된 이들은 ‘남이 피해 보는 건 내 알빠가 아니다’라는 소시오패스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모여 하나의 국가가 형성하는 이 연대사회 속에서는 이런 부작용에 따른 불가항력적 요소는 당연히 위험요소로 작용한다.단순히 정이 없고, 팍팍한 현실이라는 게 아니라, 나중에는 큰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염려다. 가령, 누가 이 더운 여름에 길거리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해보자. 여름에 유독 온열환자 혹은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환자가 급증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날씨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결과는? 아무도 안 도와준다. 내가 나서서 CPR을 했는데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만약 내 노력과 시간을 써가면서 이 사람을 구했는데도 돌아오는 보상이 없다면? 애초에 이런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고 그 환자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아마 길거리에서 그냥 죽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대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도와주는 확률보다 안 도와줄 확률이 사실상 더 높다.

대개 이런 소시오패스적 사고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있거나, 경제적 궁핍이 있거나, 생존의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어봤던 이들에게서 나올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어릴 적 돈 때문에 불화가 심했거나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돈에만 환장해서 돈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고 돈만 좇을 것이고, 가정이 불행했다면 본인과 잘 맞는 배우자를 어떻게든 찾으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모든 집착은 결핍에서 오거든.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든 이 팍팍한 현실은 그만큼 이 사회에 속한 개개인이 살기 힘들다는 걸 반증하는 꼴이다.


감성의 영역에만 치우치면 문제해결이 더디고, 이성의영역에만 치우치면 삶의 질이 풍요롭지 못하다. 감성과 이성은 균형을 이루는 부분이지,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되고 맞다, 틀리다를 단정 지을 확실한 정답도 없다. 지금이야 이런 민원에 참고 넘기던가, 더 이상 위로 멘트를 하지 않든 손쉬운 대처가 가능하나 한 개인의 불편함이 과해지면 그는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버린다. 그러면 그런 개인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병들겠지. 국가적 시스템도, 법도, 개개인의 도덕성도 어쨌거나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 의견합치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이나마 이 힘든 시기, 상호 간에좋은 쪽으로만 얼굴을 비추려면 연대와 배려가 무조건선행되어야 한다. 덜 예민하고, 덜 민감하고, 본인만의 생각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실상 스스로 바뀌는 법뿐이다. 스스로가 가진 병이 나아야 한다.

밖에 산책도 나가고, 책도 읽고,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조금 멀리서 매사에 접근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죽는 우리 이 유한한 삶에서 육체보다는 사실상 정신이 먼저 맑아지고, 여유를 가질 때 더 이상 이런 소식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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