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솔로를 찬양하는가
친구끼리 밥을 먹는 다치자. 친구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갑을관계가 존재한다. 어떤 기준이냐. 더 상황이 낫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은 그 무리에서 자연스럽게 갑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을이 된다. 밥을다 먹고 계산대 앞에서 친구들끼리는 알량하고 가식적인 언동으로 서로가 계산하겠다고 싸운다. 그러다 마침내 베풀 수 있는 권리를 따낸 누군가는 흡족해한다. 상대에게 관대해질 권리를 기어코 따낸 것이다. 내기에서 진 다른 친구들은 실망한 얼굴을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자, 여기서 보자. 여기서 중요한 건 실랑이를 펼치는 이 무리의 모두가 본인이 이기고 진 횟수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만약 똑같은 사람이 계속 계산대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이겨 그들만 계속 쭉 밥값, 술값을 계산한다면? 그 모임은 지속가능성측면에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상대가 몇 번 샀는지, 내 차례는 언제 도래하는지 다기억하고 있다는 거다. 마치 축의금 같은 것. 내가 10만 원을 내면 상대도 내 결혼식 때 10만 원을 내고, 15만 원을 내면 내심 고마워하겠지만 만약 5만 원만 냈다면 그냥 큰일 나는 거다. 나 같아도 전화해서 한마디 할것 같다.
한 연인이 있다. 1차 분위기 좋은 파스타집에서 파스타를 먹고 남자가 계산을 하는데, 남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밥살 테니까 네가 커피 사!
아뿔싸. 이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여자는 기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남자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여자는 본인이 커피를 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남자가 이 말을 하는 바람에 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리고는 이 계산적인 만남을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런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연인들은 데이트통장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가 합의 가능한 룰을 정해 연애를 즐긴다. 여기서 둘 사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는 깊어지면 깊어졌지, 더 얕아지지는 않는다. 연애나 결혼을 생각하는 솔로시장에서 결정사가 흥행하는 이유 자체도 '나는 어떻게든 결론적으로 손해보지 않겠다'라는 심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연봉이 오르거나, 예상치 못한 공짜돈이 생기거나 금전적으로 좋은 일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명절만 되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많아지기에 서로가 매사에 조심스러워지거든. 그렇게 침묵은 길어진다. 왜? 말하면 당연히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할지언정, 더 본인에게 효도하길 원하게 되고, 기존 용돈 30만 원을 주던 것을 50만 원 100만 원도 나중에 크게 고마워하지 않게 된다. 상황이 좋아졌으니 그 정도는 베푸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거든. 반대로 100만 원 주던 걸 50만 원, 30만 원 준다고 생각해 봐라. 난리 난다. 결국은 이것도 뭐다? 결국 손해보지 않으려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부부나 모든 관계에서.
매일같이 베푸는 선한 사람도 받은 건 까먹을지언정 베푼 건 기억 잘한다. 그 매일 같은 베풂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로지 선행만을 위한 목적은 현 자본주의에서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타인은 그 사람을 일부러 나쁘게 생각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본인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의심을 하고 본다. 공짜점심은 없는 세상이니까.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친구, 지인도 사소한 전화 한 통에 놀랄 때가 많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연락이 오면 우리는 가장 먼저 핸드폰을 보면서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불안이 엄습한다.
어? 얘가 왜 전화 왔지?
그래서 우리는 혼자를 자처한다. 돈이 많아 베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 해도 타인은 언젠가는 본인이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하고, 계속 베푸는 입장에서도 '사람인지라' 지금 내가 몇 번째 이러고 있는지 계산할 수밖에 없다. 십억이 있는 사람에게 만원과 백억이 있는 사람에게 만원은 체감차이가 크다 생각하지만 그것이 상대를 위한 돈이 되면 사실 돈의 가치보다 행위의 유무로 생각하게 된다. 결국 다 품앗이 개념.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잘해주면 의심만 사고, 반대로 또 본인이 너무 힘든 상황이라 돈에 너무 인색해도 뒤에서 욕먹는다. 그래서 내가 잘났든, 못났든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혼자가 편하다는 것. 이래서 나이가 들면서 카카오톡 메신저 친구정리를 더자주 하게 되고, 갈수록 연락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회적 연대를 기초로 한다. 그게 곧 존재 이유가 된다. 이는 매사에 드러나는데, 가족을 구성하고 친구, 사회생활에서의 관계를 맺는 걸 넘어 우리가 오락으로 즐기는 스포츠만 봐도 그렇다. 내집단과 결속을 다지고 팀을 만들고 외집단과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우리 팀이 승리하길 바라는대리감정이 존재한다. 2002년 월드컵 생각해 봐라. 우리 팀이 이긴다 해서 내 지갑에 돈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서로 얼싸안고 미친 듯이 좋아한다.
이긴다는 건 지배계층이 상존하는 인간세계에서 위를 선점했다는 거고, 승자와 제휴해서 이익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존재하고 회사에서도 직책, 직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물며 줄타기 라인마저도.
관계의 결속에서 주는 희열이 이렇게나 크다.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르는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은 교도소 죄수들도 혼자 독방에 가두는 것보다 다인실에서 함께 있는 걸 선호한다. 무섭고 외롭고 고독하니.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이다.
자, 그럼 여기서 중요한 건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혼자를 자처한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으니까. 이 상황을 모두가 이제 인지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고착화될수록 개인주의 또한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그러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고, 저자세로 비굴하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보다, 건방지다고 욕을 먹더라도 내가 베푸는 쪽이 훨씬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가족, 친구, 지인, 연인에게 베풀면 베풀수록(물론 본인은 철저한 계산이 이뤄지겠지만)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인품이 좋은 사람, 좋은 이미지로 각인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바라는 걸지 모른다. 본인 자랑을 하면 자랑비를 내야만 그 자랑을 받아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가 주식 수익 자랑을 하면 카톡 단톡방에서는 지인들이 장난으로캡처본을 올리기 전에 밥부터 사라고 한다. 다 들어주고 축하해 주겠다고. 결국은 내가 잘돼야 주변 사람도 있는 거고, 아쉬운 소리 할빠에 내가 베푸는 쪽이 되어야 그 지인들과의 선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혼자 있을 때에도 비굴하지 않고 더 당당해진다.
현대인 인간관계에서는 각자 의례적이고 알량한 가면 뒤에 진짜감정이 숨어있다. 신뢰도, 믿음도, 의심도, 혐오도 어쨌든 서로 적당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나만 생각하는 간사한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여름날 문득 머릿속에 스친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