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나락에서의 버팀목에 대하여
서른즈음에 2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나는 퇴사를 했다. 서른 즈음에의 노래처럼 정확히 30살을 고작 6개월 남긴 시점이었다. 자발적인 퇴사였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하긴, 그것이 지금 조직을 나와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 회사를 다닐 때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불규칙적인 수면, 식사 때문에 몸이 점점 불어나 바지가 맞지 않았다. 퇴사를 하고 나서는 정확히 살이 6킬로나 빠졌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니 너무 행복해서 몸이 다시 원래의 무게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구 회사였는데 생전 본 적도 없고 사용해 본 적도 없는 공구별 특징을 몇십 개나 외워야 했다. 각 기계마다 설비마다 쓰이는 공구가 다르기 때문에 쓰임새를 모조리 암기해야 했다. 철저한 문과생으로만 살아온 나는 이 부분이 참 생소하고 어려웠다. 물론 공대생이라고 해도 공구의 배경지식은 많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 기계별 공구를 사용하게 될 절삭 각도를 계산하고 효용성을 검증하는 일이었기에 숫자에 능해야 했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직무에 대한 회의감이다. 이 직무는 기술영업이었다. 성격이 태생적으로 밝아 사람 만나는 걸 참 좋아한다. 단지 이 이유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영업을 선택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과 사람을 만나 내 물건을 팔아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내가 선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그 누가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겠는가? 공구를 팔기 위해서는 대부분 해당 설비가 있는 영세한 중소기업을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고객들이 일을 하는 도중에 우리 제품을 설명하고 다이어리로 기록할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다. 어딜 가든 조직에서는 대인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살아온 환경, 가치관 나와 180도 다른 보수적인 분이셨고 내가 하는 행동, 말 모든 것에 딴지를 거셨다. 개인시간이 없이 매일 저녁을 불러 다니며 술을 마시고 다음날 7시에 출근해야 했다.
하루는 술을 잔뜩 취하고서는 본인의 시계를 나보고 차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소장님의 시계를 감히 차냐고 거절의 의사를 드렸는데 끝내 차보라는 말에 찼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이런 시계 차고 싶지? 그럼 내 말 잘 들어서 높이 올라가야 하는 거야, 복종을 하란 말이야 복종!"
부모에게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복종이라는 단어를 생전 처음 들었다. 아, 중학교때 영어단어를 외울 때 obey 복종하다 한번 들어봤을 것이다.
"복종은 못하겠는데요"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그다음 날 나는 바로 퇴사했다. 그래도 마지막 기억은 좋게 마무리하고자 양말을 사 전 직원에게 돌렸다. 그냥 회사와 나 서로에게 미스매치였던 것이다.
퇴사하고 내려온 고향 울산은 변함없었다. 나만 그 사이 더 늙고 볼품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아, 남의 돈 벌기가 이렇게나 힘들구나!"
또다시 지난번의 악몽과도 같았던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옥같은 일상은 또다시 반복됐다.
왜 나한테만 맨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루가 다르게 불안함과 초조함에 다시 이력서를 쓰고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처럼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집중력이 흐려졌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몰라 방황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장이 없으니 내세울만한 명함도 없거니와 굳이 내가 자리를 못잡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의 " 잘 지내냐, 항상 응원한다" 와 같은 연락도 약속을 잡아 얼굴이라도 볼까 싶으면 또 돈이 드니 만나는 거 자체도 부담이었다.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은 가족과 여자친구 둘 뿐이었다.
나이 서른에 직장도 잃고, 돈도 없고 울산 고향으로 내려와 여자친구도 잘 못 보는 상황에서 여자친구는 불만을 토로했다. 미칠 지경이었다.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보고 싶을 텐데 울산으로 가버리니 그녀에겐 내가 사이버 남자친구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면접은 면접마다 다 떨어지고, 이메일은 불합격 문자로만 가득했다. 그녀도 날 떠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 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원래 이 회사도, 여자친구도, 그냥 내 인연이 아니었거니 다시 0부터 처음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하루하루 공부에만 전념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돈이 없다고 친구도 잘 안만나고 틀여박혀 공부만 하는 내게 여자친구는 어느 날 말했다.
"돈 없으면 내일 당장 노가다라도 뛰면 되지, 젊은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난 너 옆에 늘 있을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감동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가진 게 얼마가 있던 처음 만났던 내 본래의 모습만 중요하고 부수적인 외적인 요인은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했다.
진짜 죽도록 힘들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찾은 것이다. 그 명분은 딱 하나였다. 내게는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99프로를 잃어도 이렇게 여자친구 사소한 말 한마디 1%에 내 몸은 움직였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겐 남아있는 작은 불씨가 있었다.
그렇게 난 그 다음 달 대기업에 최종합격을 했다.
꼭 무언가 이루겠다는 내 스스로의 의지보다 나를 믿어주는 버팀목들이 어쩔 땐 좋은 결과를 내는 데 더 큰 역할을 한다. 내 능력, 운도 중요하겠지만 내 여자친구와 같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새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때 이후로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될 때까지 해보고 그때 그만둬도 늦지 않다.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럼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했던 내 서른 살의 노력들이 또 다른 길을 만들었다. 요즘엔 늦은 것이란 없다. 대기업을 다니는 자녀 2명을 키우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얼마 전 수능을 쳐 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보았다. 이 분은 돈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평생 원했던 본인의 꿈을 마침내 실현한 것이다. 내 꿈이 돈보다 훨씬 더 진하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 용기를 그대로 갖고 32살을 맞는다. 내겐 아직 써야 할 페이지가 너무 많고, 못 다한 얘기가 너무 많다. 읽지 못한 책이 너무 많다. 오늘 새벽, 이불을 개며 내 버팀목들을 생각한다. 또 무언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