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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 40대의 필수 숙제

영포티, 무엇이 문제인가

by 홍그리

취업면접에 떨어진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한다.


“괜찮아, 기회는 많아, 넌 아직 젊으니까”


카페를 창업했다가 망하고 다시 새로운 재기를 꿈꾸는 친구에게 지인 형이 말한다. 다음은 브런치 가게를 기획 중인데, 투자하는 돈이 돈인지라 또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확신이 안 서고 있다.


“야 인마, 아직 젊은데 뭐가 걱정이야”


월 200 남짓 월급을 받으며 예적금만 하는 동생. 서울 집값이 10억이 넘은 지는 오래고, 주식, 코인으로 돈복사하는 지인들을 보며 포모현상이 와 아침 출근길이 불행하다는 이에게 직장의 부장님이 이런 말을 한다.


“아직 너넨 젊어서 기회는 많아”


일확천금을 노리고 코인선물에 뛰어들다 억 단위의 돈을 날렸다는 유튜브 사연에 무수한 조롱 섞인 글 가운데 몇 개의 희망찬 댓글이 보인다.


“아직 젊어서,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힘내세요”


모든 게 ‘젊음’으로 귀결된다. 돈을 잃어도, 의미 있는 자산을 만들지 못해도, 몸이 아파도, 월 200만 원밖에 벌지 못해도, 면접에 떨어져도 다 괜찮다. 왜? 아직 젊으니까. 젊음은 무적이다. 현대사회에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고유명사가 됐다. 인생에 100%는 없다 했던가. 이 글이 무색하게도 혹여나 그 젊음이 늙어서 기회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생 큰돈 한번 만지지 못하고, 벤츠한번 끌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근데도 괜찮다. 젊음이 있는 한 기회가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올 생각도 없는 그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란 게 최소한 청년들은 있으니까.


시간이 흘렀다. 청년들은 이제 모든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해주는 이 위로 섞인 습관을 무기 삼기에 이른다. 인생이 심심하니, 존재하지 않는 혐오의 대상을 집단화해 억지로 만들기에 이른다. 젊음이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그 자체를 스펙 삼아 그 젊음의 부재의 대상을 콕 집어 힐난하고 조롱한다. 그 대상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다. 이제 그 젊음을 막 잃은, 잃었다는 표현이맞을진 모르겠다. 젊음이 막 없어져 아쉬움이 가득한 세대, 후회만 막심한 세대, 40대. 이 40대가 청년에겐 그럴싸한 표적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탄생한 밈이 이름하여 ’영포티’다.

영포티는 말 그대로 영(Young)+포티(Fourty)를 섞은단어로 젊음(정확히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40대를 조롱하는 단어다. 생물학적 나이는 40대지만, 패션이나 마인드, 감각과 생각은 늘 20대, 30대로 세대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는 40대들을 통틀어 이르는 단어. 자,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실제론 늙었지만 젊음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현대사회는 젊음이 곧 스펙이 된다. 왜 스펙이냐고? 어떤 대단한 고유명사로 설 수 있다는 가능성, 부의 생산, 사회의 정상적기능요소, 올곧은 자기 주관이나 개성, 취향, 체력과 건강 이 모든 걸 ‘나이 듦’과 ‘젊음‘의 차이로 보는 사유에서 나온다는 반증이다. 이 사회가 대놓고 40대 이상 나이 든 사람을 억까(억지로 까내리기) 하니, 이들도 어쩔 수 없이 외적인 모습만큼은 젊게 유지하고 싶기에 이 사단이 난 거다.


지드래곤의 유명한 노래 <삐딱하게>의 노래 중엔 귀에 절대 잊히지 않는 가사가 있다. 바로,


영원한 건 절대 없어!


맞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언젠가죽는다. 부모도 죽고, 나도 죽고, 내 자식도 죽는다. 과거 조선시대 때엔 60살까지 사는 게 드무니, 60살을 맞이한 이들의 장수를 축하하고 기념하고자 환갑잔치를 했다. 그게 현 환갑의 유래다. 지금은 못해도 최소 여성기준 평균 85세, 남성은 80세까지는 살지 않나. 기술발전으로 수명을 연장시킬 순 있어도, 그 연장엔 한계가 명백히 존재하며 생물학적 늙음은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순 없다. 누구나 백 살, 아니 삼백살까지는 살고 싶다. 과거에 왕이나 재력가들이 그 어떤 수를 써서도 이루지 못한 게 수명이다. 흐르는 지금 이 시간 자체가 소중한 것도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가 없으니 그렇다. 최근에 논쟁의 대상으로 붉어진 가임기 논란도 마찬가지. 여자가 만 35세 이상이면 생물학적 노산이 맞다. 실제로 맞다. 근데 어떻게든 요즘은 40대에도 애를 낳는다느니, 기술발전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느니, 결혼을 늦게 하고, 출산을 늦게 하는 건 여자에게더 이상 손해가 아니라느니 하는 과학을 상대로 이기려 들고 맞서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연애프로그램 돌싱특집 편에서 40대가 난자를 얼려놨다는 걸 본인 스펙에 포함시키는 건 얼마나 과학을 상대로 덤비는 일이 부질없는 일인지를 반증한다. 동일성별이 같은 편을 가르치고 있는 셈.

나이 듦으로 노산이든, 노총각이든, 탈모든, 체력저하든, 늙는 건 어쨌거나 이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 관리를 하고 대처를 잘하나의 영역이지, 그걸 못 받아들이면서 겉으로는 20대, 30대를 쫓는 40대가 있다면 그건 청년들에게 조롱받아도 사실상 할 말이 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태어나면 누구나 언젠가 되는 것이고, 어떻게 어른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건 단순히 나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도 즉, 상황에 따라 사리분별을 명확히 하고 이를 기민하게 대처할 줄 알며, 책임질 수 있는 걸 기꺼이 책임지는 능력을 갖춘 이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단순히 20대처럼 슈프림 신는다고, 반바지에 흰색양말 롤업하고, 포터가방 메고, 아디다스 져지 입고, 스투시 반팔 입고, 볼캡 모자를 쓴다고 영포티라 조롱받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어른 즉, 존경의 대상의 부재가 이런 밈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옷차림과 외적인 요소로 20대 30대 청년들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그들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인격의 성숙과 전혀 대비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직접적으로 욕할 순 없으니 영포티라는 밈으로 청년들이 상대하고 있는 게아닐까. 2030에겐 얼마나 사이다 발언이냐 이게.


배울 어른이 없고, 롤모델로 삼고 싶은 어른이 없어지는 사회다.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가 않아 자리자체가 사라지기에 청년들은 굳이 따라가려 하지도 않는다. 돈만이 인생을 보존해 주고 예의와, 인격, 여유 이 모든 게 돈에서만 나오는 게 실제로 맞다면 권력자들의 다툼과 내로남불은 왜 사회이슈가 되고, 범죄는 무조건 가난한 이들에게서만 나와야 하며, 강남 자영업자 가맹점주들은 왜 고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가.


젊게 살자는 메시지는 좋다. 20대, 30대는 무조건 세련되야 하고 힙해야 하고, 40대는 조금은 2% 부족하고 올드하고 촌스러워야 하나? 기가 차는 발상이며 그럴 이유 전혀 없다.

나도 어느덧 그 나름대로의 젊음을 유지하고픈 어른이됐고,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인격적 완성이라던가, 다양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어른으로 될지는 미지수. 최소한 이처럼 젊게 살려는 대가로 진짜 20대가 갖추지 않은 어떤 알파는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알파라고 하면 모두가 원하는 경제적 여유뿐 아니라, 포용과 이해, 배려, 본인만의 인생의 서사, 배움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 왜 그런 어른이 아예 존재자체를 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면 팍팍해진 삶 그리고 어려운 민생경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복잡한 주변 이해관계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30 청년도 마찬가지. 나에게 현재 주어진 그 당연한 젊음이 본인 인생 최대의 업적이 된다면 곤란하다. 내 20대 최대 업적이 젊은것이고, 아이폰 에어에 수입차 타는 거라면 얼마나 쪽팔리나. 포용은 둘째치고 영포티들이 뭘 하나 가르쳐주려 하지도 않을 거다. 커피 한잔도 안 살 거다. 영포티는 이처럼 단순히 옷차림을 넘어 심오하고 복잡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도 단순히 청년의 표를 잡기 위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바른 행동과 존경의대상이 될 수 있도록 연기학원이라도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러면 최소 주위사람들은 둘째치고 내 자식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비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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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