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대하여

6화: 비판

by 홍그리

선택이라는 건 극명하게 상대적이다. 본인이 처한 상황과 겪었던 경험 혹은 머릿속에 강하게 인지하고 있는 가치관 이 모든 것이 혼합돼 찰나의 순간 결정되는 것이기에 더 그렇다. 본인에겐 그 어떤 위기 상황에도 견딜 수 있었던 평생의 정답이 다른 누군가에겐 명징한 인생의 오답일 수 있고, 그 반대도 물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현대사회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이 선택의 영역이 아주 빠르게 실시간으로 서로 공유돼 그 사이에서 날 선 반응으로 상처받거나 좌절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자기 보호 성향도 바탕이 된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싸우거나, SNS로 험한 말이 오가고, 번지고 번져 사회 이슈가 된다.


먼저 정도의 차이. 예를 들어보자. A는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 공무원을 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매달 받는 월급과 각종 회사복지 그리고 빵빵한 퇴직금과 공무원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가 보장되어 있다.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A는 아주 높은 확률로 미래에 대기업에 지원하거나 대기업에서 만약 고배를 마신다면 공무원준비를 할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랍시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라는 어떤 당돌한 청년세대의 가치관과는 조금 벗어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선택에 자기 합리화를 하며 본인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겠지. 추후 합격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믿으면서 계속 살 것이기에.


B가 있다. B의 부모님은 사업이 망해 매일 이사를 다닌다. 원룸을 전전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B는 부끄러워 친구들과의 하굣길에도 집을 속이면서까지 뺑뺑 둘러 집에 간다. 대학도 국가장학금을 받지만 도저히 생활비가 없어 학교를 다닐 여력이 없다. 바로 돈을 벌어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전문기술이 없어도 단기간에 큰 소득을 벌 수 있는 보험영업, 폰팔이, 노가다판을 전전한다. 그래서 10년을 버텼고 아직 결혼은 비록 꿈도 못 꿀지라도 지난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 당시 대학을 갔던 동기들도 그렇게 학교에 돈을 퍼붓고도 취업을 못하고 있거든. 그렇게 B는 육체적으로 힘들지라도 매일 아침 스스로 주문을 되뇌며 집 밖을 나선다.


A와 B가 내린 선택의 근거는 집안환경 즉, 정도의 차이다. 그리고 서로 본인인생이 맞고 아니, 정답이 아닐지라도 자기 합리화와 서로에게 날 선 비판을 할 수 있는 건 본인이 가진 환경의 정도 차이에서 온다.

이외에도 B처럼 힘들게 커온 누군가는 요즘 유행하는 ‘몇 살 때엔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공식’에서 당연히 나이 서른 정도 되면 일억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너무 힘들게 자랐으니까 돈은 아예 쓰지않는 거라고 배웠거든. 근데 그 반대로 일찍 대기업에 취업해 돈만 모은 A는 나이 서른 중반에 ‘아, 돈 좀 모으면서 살걸’이라며 지난 청춘을 100% 즐기지 못했다는 좌절에 괴로워할지 모른다. 지난 20대의 황홀한 추억이 없거든.

내가 만원이 있으면 음식점에 가 아주 당연히 만원 혹은 만원 이내의 메뉴판만 본다. 어차피 그 이상은 돈이 없어 못 먹으니 아무리 평소에 좋아했던 다른 메뉴가 있더라도 만원 이내의 메뉴만 시킨다. 본인이 겪은 경험대로 삶에 맞닥뜨릴 무수한 경험에 역치를 매기고, 어쩔 땐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어쩔 땐 더 높이 못 가는본인의 환경을 탓하거나 하면서 그렇게 그냥 산다. 본인의 인생이 부정당하기 싫으니 그걸 방패로 삼는 방법이 결국은 상대의 삶을 평가하고 날 선 비판의 잣대를 세우는 거다.

결국은 무언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만드려고 이것저것을 매사에 선택하는 건데 정도의 영역에서는 지금 내 환경에서의 최대 만족을 느끼는 일을 많이 만드는 게 현명하다고 본다. 지금 당장 환경을 바꿀 수 없으니.


다음은 다름의 문제. A는 취업을 못하고 있는 친구 B에게 위로를 건넌다 하자.


너는 영상편집 이런 거 잘하잖아. 유튜브나 해봐


취업을 못하고 있으니, 너무 취업에만 매몰되지 말고 네가 잘하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해 보라는 친구의 진정성 있는 조언이었다. (A 생각에는).


그런데 B는 이를 조롱으로 받아들인다.


뭐야, 지 대기업 다닌다고 나는 뭐 취업도 못한다는 거야? 교묘하게 본인 강점 삼아서 돌려까네?


그리고는 A에게 화를 내면서 사이가 틀어지거나, 참다가 폭발하거나. 객관적인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논쟁의 사실여부는 A만 안다. 근데 문제는 설령 A가 선량한 마음으로 했다 하더라도 B가 위처럼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A는 억울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의미전달이 이렇게나 왜곡된 이유? 그런 거 없다. 그냥 둘이 다른 사람이라 그렇다.

누구는 횡단보도를 초록불 때에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빨간색이라도 차가 없으면 가도 된다 생각한다. 칭찬을 해도 누구는 욕으로 받아들이고, 욕을 해도 누군 관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냥 다름의 문제다. 그렇게 각자 본인만의 생각으로 본인만의 선택을 하고 그 가치관에 끼어드는 타인을 비판하면서 본인만의 우주를 차차 넓혀간다.


이렇듯 우리는 비판과 비교의 시대에 산다. 다만 내 작은 바람은 그 비판에 두려워할 필요도, 매몰될 필요도 없다는 것. 삶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반이 되는 각자의 영역을 더 키워나가려면 어쨌거나 비판에 아무렇지 않게 더 익숙해져야 한다. 한없이 무뎌져야 한다. 특히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생산자들은 더더욱. 그래야 내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린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