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6
25.11.02 (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장 13절]
묵상과 기도로 무장.
주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예배 50분 전 원당에 도착했다. 묵상한 큐티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1층의 메가커피에 자리를 잡았다. 교회에 들어가면 예배 준비로 바쁘기에 반드시 별도의 장소에서 정리해야 한다. 교회에 가기 전에 나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나를 보호해야 한다. 마음 편하게 가기엔 아직 우리는 영적 전쟁 가운데 있다.
전도축제.
오늘 예배에 7명 전원이 참석했다. 새 예배당에서 드디어 모인 완전체. 하나님은 또 한 번 역사를 쓰신다.
저번주에 이어 오랜만에 참석한 성도들을 위해 담임목사님께서 23일을 전도축제의 날로 선포하셨다. 참석 인원과 상관없이 일 년에 두 번씩 가지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 교회는 순종으로 나아간다.
주보 안에는 전도대상자를 적는 리스트가 있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회사 동료 두 분과 친구의 이름을 적었다. 모두 소재지는 서울이다. 고양시에 위치한 교회로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구할 것이다.
문득 오랫동안 품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복음은 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전도는 자신이 먼저 설득되어야 한다. 내가 초대하고 싶은 교회인가. 지인을 초대함에 있어서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거리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다. 거리도, 시간도 뛰어넘는 것은 결국 예배다. 그리고 예배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내가 누림으로 상대방 또한 동참하게 하려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복음은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왕복 세 시간을 극복하며 가야 할 '그' 교회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공동체를 찾는 친한 형에게 우리 교회를 추천했던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그 형은 몇 주간 나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우리의 나눔은 좋았지만 청년부 인원도 적었고 서울에서 먼 거리를 출석하기엔 다른 선택지들이 많았다.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복음은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교회로 초대할만한 이유에 내가 설득이 되지 않았다. 나조차 청년 공동체를 찾아 오후에 길을 나서지 않는가. 청년 공동체에 대해서는 같은 연령대와 나눔을 가지기 위해 그렇다고 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예배를 돌아볼 때 나는 초대장을 꺼낼 수 없다. 헛웃음이 나온다.
예배 가운데 말씀은 귀에 제대로 들린다. 본문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사건을 다루었다. 그랄로 이동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 속여 불렀던 애굽에서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했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에게 아내인 사라를 빼앗겼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의 통로가 끊길 위기에 처해졌다.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아브라함의 편에서 아비멜렉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질책하신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다.
말씀이 이리도 내 귀에 생생하게 이해되며 울리는데 왜 나의 마음 가운데 눌림이 있고 이리도 답답할까. 왜 나는 이 예배 가운데 자유함을 누릴 수 없는가.
난 이 괴리가 싫다. 참을 수 없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나는 이 문제를 들고나갈 곳을 기억함에 있다.
이렇게까지 부르실 일인가. 내 두 손, 두 발을 듭니다. 부르시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님, 나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줄 압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하신 줄 아십니다.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 나도 주님 알게 하소서. 나도 주님의 마음 알게 하소서.
나의 불만의 입을 닫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하고 예배의 자리가 분명하니 묵묵히 내 여리고를 돌겠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한 주 열심히 기도하였기에 혹시나 오늘인가요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또다시 기도하고 또다시 실망하겠습니다. 내 기대의 좌절을 인내하겠습니다.
그 좌절의 순간에 나의 때가 죽고 주님의 때를 바라보겠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성화를 누리겠습니다.
내게 선하신 주님, 당신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다시 소망으로 씨를 뿌리게 하소서. 금이 간 마음을 치료하시고 굳은살을 더하소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영광과 고난의 상속자, 당신의 예배자로 살겠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주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주장하소서.
주님이 달라하시니 나의 기대까지 드립니다. 받으소서. 나는 당신 안에 거하겠습니다.
예배의 자유함을 위해 목요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겠습니다. 수요예배에 이어 다음날 새벽 이 교회에 기도를 심겠습니다. 부족한 자의 기도를 이렇게도 원하시니, 제가 응답하겠습니다. 제가 심겠습니다. 가서 그 시간을 바치겠습니다. 부르신 제단 위에 기도의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주님 주신 체력으로 제가 이 기도의 깊이를 뚫어보겠습니다. 제가 침노하겠습니다. 천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것이 지금 제게 주신 사명이자 하나님 나라임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자유함을 허락하소서. 고양 땅에 심으신 당신의 교회에 십자가 은혜가 진동하게 하소서. 성령님 운행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영광을 드러내소서. 주의 자유함안에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하소서.
내게 전도를 명하시고 그 괴리 속에 두지 마소서. 그러지 마소서. 부디 그러지 마소서.
내가 기꺼이 초대하는 예배의 처소. 말씀이 살아있는 곳. 당신의 포근한 임재가 머무는 곳으로 세우소서.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 그리고 확실한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손에 맡깁니다.
수요일.
새벽기도에 성공했다. 지난주보다 하루 더 빨랐다. 이렇게 되면 다가오는 주가 더욱 기대된다.
금요일.
청년공동체 교회의 특새기간이다. 그리고 저녁 금요기도회까지가 마지막 집회다. 거리로 인해 새벽에는 참석하지는 못하였지만 저녁예배 가운데 기도의 시간만큼은 꼭 채우고 싶었다. 22시부터 막차시간까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나는 통성으로 두 시간의 기도를 드리기로 작정했다.
예수의 능력을 경험하는 내용의 설교였고 마지막 포인트로 그의 권세와 이름을 선포하라 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록되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간구는 주님이 행하시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나는 이 말씀을 붙들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선포했다.
이것은 주문이 아니다. 말씀이요 능력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축복의 통로다.
그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할 때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꽉 찬 2시간. 2025년 10월의 마지막과 11월의 처음을 예배와 기도로 올려드렸다.
토요일.
새 큐티책, 에스라서로 초대하신다.
묵상.
하나님은 마음과 상황을 움직이신다. 하나님의 때에 이방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하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고레스는 유다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 명하였다. 이 자유의 명령 아래 유다 백성들은 마음속에 동일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70년 세월의 익숙함을 던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하나님의 때에 상황이 열리고 물질이 더하여지고 순종의 마음이 진동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70년.
한 나라가 멸망하고 두 세대가 지난 시간. 역사 속에 흔적 없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마치 한 페이지를 넘김에 새로운 주제가 펼쳐지듯, 한순간에 상황이 변했다. 70년은 겸손케 하는 시간이요, 정화의 시간이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은 자신의 백성을 돌이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단절의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 약속된 사랑이었다.
정확히 예견된 기한의 때에도 백성들의 일상에 특별한 조짐은 없었을 것이다.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회복의 언약 속에 말씀을 의지했던 당신의 백성이 있었을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때를 한해 한해 셈하며 출애굽과 유월절의 여호와를 기대하던 믿음의 사람이 있었을까. 이쯤이면 예레미야를 통한 약속의 때가 임박했음을 기억함으로 소망의 꿈을 품은 순전한 기도가 드려졌을까.
인간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하나님은 권력의 최정점에 직통으로 계시하신다. 이방의 통치자가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의 주관자시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그의 일을 행하신다.
기대.
이 사건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난 두 번째 해방이자 광복이다.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두실 성전을 건축하라 명하신다. 그의 백성들의 예배를 간절하게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친히 택하신 예배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유다 백성의 상황이 손바닥 뒤집듯 반전이 되는 것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 누구도 이 상황의 변화를 위해 애를 쓰거나 행동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손가락 튀기듯 자유가 선포된다. 절망이 예배가 되는 건 하나님께 달렸다.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상황만큼 가벼운 변명이 없다.
한 민족이 귀환한다. 이 역사적 사실 앞에 내가 힘겨워한 상황이 작아진다.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무엇보다 마음을 감동시키신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그의 때에 그가 감동시키신다. 이 사실이 내게 위로를 준다.
기도.
고레스를 감동시키시고 백성을 감동시키사 예배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당신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나의 상황의 주관자이심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주인삼은 인생이오니 다시 주님께 나의 상황을 맡겨드립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마음에 예외는 없습니다. 한 시대의 통치자를 감동시키시고 사랑하는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신실하신 손길로 우리를 예배하게 하소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를 선포하게 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하오니 주의 일을 속히 행하소서. 오늘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