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4
2025.10.20 (월)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왕기하 6장 17절]
아크크루 게더링예배
게더링 예배장소가 기 교회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나의 금요일 기도처인 시냇가푸른나무교회에서 드려졌다.
동생의 추천으로 알게 된 예배, 예배장소도 가까운데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뜨거운 찬양으로 예배가 열렸다. 찬양의 고백들로 나의 영이 자유함을 누린다.
유하정 대표님이 강단에 섰다. 나병에서 치유된 나하만이 떠난 이후 그의 예물을 받아온 게하시에게 내린 심판을 다룬 본문이다.
나하만은 기꺼이 그의 치유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하만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엘리사는 이방인 나하만에게 이스라엘의 전능자는 대가를 바라는 거래의 신이 아닌 은혜의 하나님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보다 멀어져 가는 재물에 발을 굴렀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그는 이미 영적으로, 이제는 육체 나병에 걸렸다. 지금은 은이나 옷을 받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때이다.
도단 성읍이 아람군대로 포위되었을 때에 엘리사의 사환이 좌절과 절망으로 그의 주인을 찾는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달라 요청하였다. 사환은 영안이 열림으로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죽이러 온 군대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찬을 베풀어서 돌려보내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봄에서 나온다. 최고의 복수는 원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아람 군사의 부대는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시대에 불병거를 보는 영안이 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우리에게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그대로. 적힌 그대로 믿고 순종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영안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근래 나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셨듯이 나로 그의 사랑을 드러내라 명하신다.
나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는 것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나의 죄악된 본성을 발견함으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마다 생생하게 발견하는 십자가의 감격을 깨닫길 원한다.
영영 죽을 이 영혼을 지목하여 택하신 은혜가 정말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싶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호흡이라는 고백이 나의 피부의 고백이자 영혼의 고백이 되길 원한다.
대표님의 말씀 가운데 이러한 내용도 있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좀 평탄해야 하는 게 아닌가?
기름이 가득 차서 빚을 갚는 기적도 다 좋지만 처음부터 빚에 시달리지 않으면 좋지 않은가?
독이 든 국이 정화되는 기적도 좋지만 처음부터 먹을 것이 넉넉한 게 낫지 아니한가?
아니다. 원래 삶이란 이러한 것이다. 원래 삶의 모습은 고난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굶주리고 있었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를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 그의 역사하심을 누렸다. 세상의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한 자들은 기적을 맛보았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늘 많다.
너무 감사한 것은 최소한 나에게 허락된 말씀을 정리하고 기록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퇴근 후 수많은 선택지 중 나는 예배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글을 적기로 선택했다.
시간을 요구하는 여러 행위 중에 다시 찾아 쓸 수 있는 기록은 유통기한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시간을 사용함에 후회가 없다.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은혜를 경험한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라 더욱 값지다.
나를 부르신 이 예배와 허락된 말씀은 나의 손을 거쳐 소화되고 나의 언어로 저장되었다.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이 기록은 부인할 수 없는 간증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정된 시간 앞에서 선택이란 삶의 고백이다.
모태신앙인 나는 스스로 삶의 주인을 정해야 하는 순간을 거쳤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으나 거부할 수 없는 환경과 확실한 부르심 앞에 내가 선택받았음이 자명했다.
나를 택하신 은혜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의미인지, 어떠한 사랑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나 이미 구원자를 깨달았고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으니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알길 원한다. 당신의 사랑의 깊이를 말이다.
나는 예배를 선택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선택했다.
이것을 내 삶의 고백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