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바람이 차고 하늘이 맑은 날이면, 남자는 2017년 겨울을 떠올렸다. 홍대의 어느 거리였다. 사람들은 늦은 저녁을 즐기고 있었고, 차량과 음악 소리가 뒤섞여 흘렀다. 그날, 그는 인파 속에서 걸음을 멈췄다.
조명 아래에서 한 여자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큰 웃음은 아니었지만 라이트에 반사된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 또렷했다. 남자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 남자친구 있으세요?”
주변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무심하게 지나쳤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잠시 바람이 스쳤다. 머리카락이 어깨에 흩어졌다가 그녀의 손끝에 천천히 정리되었다. 가게 간판의 작은 불빛이 흔들리며 그녀의 실루엣 위로 잠시 머물렀다. 아무 의미도 없는 동작이었지만, 남자는 그 장면을 유난히 천천히 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조용히 말했다.
“없으시면 번호 좀 알려주세요.”
여자는 친구를 힐끗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폰 줘보세요.”
남자는 휴대폰을 건넸고, 여자는 번호를 입력한 뒤 가볍게 돌려주었다.
그는 짧게 인사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몇 걸음 지나고서야 방금 본 장면이 조금 늦게 따라오는 것처럼 어색한 감각이 남았다. 특별한 말도, 비슷한 상황도 없었지만, 그날 이후 며칠 간 연락이 오갔고 한번의 만남도 이어졌다.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어느 날 연락이 끊겼고,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주 짧은 몇 초만은 오래 남았다.
2025년 겨울.
남자는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이유는 길지 않았다. 큰 다툼도, 미련도 없었다.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또 마음이 안 갔냐?”
“어.”
친구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규야, 넌 맨날 그래. 이런 식이면 나중에 골치 아플걸.”
남자는 대답 없이 술만 넘겼다. 그의 휴대폰에는 여전히 ‘윤슬’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연락 목록 맨 아래, 삭제되지도, 다시 눌리지도 않은 채였다.
그 이후로도 큰 일은 없었다. 그는 출근을 했고, 일을 했고, 사람을 만나고 다시 헤어졌다. 윤슬과의 기억은 서서히 흐릿해졌다. 특별히 붙잡을 이유도, 되돌아갈 근거도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어느 날에는 문득 그 겨울이 떠올랐다.
홍대의 좁은 골목,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던 자리, 그가 처음 본 얼굴. 그때 정규는 그냥 발을 내밀어 물가에 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그 순간은 이미 흐름에 휩쓸려 들어간 첫 장면에 가까웠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봐도 짧고 단순한 일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오래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2017년 겨울.
첫 번째 데이트가 끝난 뒤, 윤슬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생각을 정리했다. 정규는 말수가 적어 보였지만 예상보다 이야기를 잘했다. 외모는 이상형과 거리가 있었지만, 단정했고 깔끔했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고, 눈을 마주칠 때마다 표정이 뚜렷했다.
윤슬은 휴대전화 화면을 켜고 다음 만남의 날짜를 확인했다. 약속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시간도 확정됐다. 메시지는 짧게 오갔다. 둘 사이에 문제될 부분은 없었다. 윤슬은 일정을 비워두었고, 옷장을 열어 입을 옷을 따로 걸어두었다.
그녀는 연애 경험이 없지 않았다. 만남을 가볍게 보지 않는 편이었고, 헤어질 때도 오래 끌지 않았다. 이전 연애에서 배운 것들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규와의 만남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서두르지 않았고, 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약속된 두 번째 만남을 준비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며칠 뒤, 다음 만남을 하루 앞둔 밤. 윤슬은 늦은 귀가 중이었다. 길은 조용했고, 신호등은 바뀌려는 중이었다. 오토바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충돌은 예고 없이 일어났다.
새벽 네 시, 중환자실이었다. 윤슬은 붕대를 감은 상태로 누워 있었고, 의료 장비가 일정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휴대전화는 사고 현장에서 수거되었지만, 정규에게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았다.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 다만 실행되지 못했을 뿐이었다.
윤슬이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중환자실 천장에 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발음이 흐릿했다. 의료진이 상태를 확인했고, 진단은 곧 내려졌다. 머리 손상으로 언어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윤슬은 면회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꺼두었고, 연락을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 병실로 옮긴 뒤, 가족만 드나들었고, 친구는 오지 않았다. 의료진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병실 복도는 늘 조용했다. 윤슬의 침대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거울은 뒷면이 보이게 엎어져 있었고, 화장품 가방은 병실 서랍 맨 안쪽에 들어 있었다. 누군가 간단한 과일과 음료를 두고 갔지만, 먹은 흔적은 없었다.
입원 초기보다 움직임은 나아졌지만, 팔과 다리에 보호대가 채워진 상태였다. 금속 고정 장치가 피부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고, 갈비뼈를 보호하는 보조기는 수면 중에도 벗기지 않았다. 간호사는 정해진 시각마다 윤슬의 몸을 일으켜 앉혔고, 물리 치료사는 근육을 움직이는 연습을 반복시켰다.
언어 재활 시간에는 작은 발음부터 따라 했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단어가 정확히 이어지지 않았다. 윤슬은 말을 멈추고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종종 웃는 얼굴로 넘어가듯 입을 다물었다.
퇴원 환자가 짐을 싸는 날이면 병실은 분주했다. 보호자들이 쇼핑백을 들었고, 환자들은 옷을 갈아입었다. 윤슬은 창가 쪽 침대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침대 끝의 보호대에 손가락을 걸고,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느 날, 의료진이 다가와 말했다.
“옮길 준비하세요.”
윤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휠체어가 침대 옆에 놓였다.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고,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병실 생활은 일정했다. 약을 먹고, 재활을 하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가끔 불이 꺼진 병실에서 천장을 오래 바라보는 밤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눈은 감기지 않았다. 윤슬은 이제 SNS 계정도 삭제했다. 서랍 속 휴대전화는 알람 없이 조용했다. 연락이 오는 일도, 보내는 일도 없었다. 정규에게 연락은 가지 않았다. 번호는 다시 저장되지 않았고,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다만 계정 삭제 이후, 더 이상 없앨 항목은 남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할 사람도, 설명할 말도 없었다.
병실 생활이 길어지면서 말은 더디었고, 움직임도 불편했다. 스스로 밥을 먹는 연습을 했고, 글자를 따라 적는 연습도 이어졌다. 간호사는 작은 칠판을 건넸고,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글자를 적었다. “괜찮다”라는 글씨는 삐뚤어져 있었다.
연락은 갑자기 끊겼다. 정규는 이유를 몰랐다. 며칠 동안 메시지를 보냈고, 답은 오지 않았다. 화면 속 대화창은 그대로였다. 출근길, 그는 버스 안에서 윤슬의 프로필 사진을 몇 번이나 눌렀다. 사진은 사라져 있었다. 계정도 보이지 않았다. 삭제된 건지, 차단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규는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와의 제대로 된 만남은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모든 장면에 그녀가 스며 있었다. 회사 복도에서 스치는 향, 카페 창가의 빛, 공원 벤치에 비친 그림자. 어디서든 문득 떠올랐다. 그가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관계가 끝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윤슬만큼은 달랐다. 만난 순간부터,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억이 그렇게 남았다.
밤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누웠다. 문자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웠다.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연락처에 남아 있었고, 지우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정규는 같은 길을 걸었다. 둘이 처음 마주쳤던 거리였다. 그곳에선 매번 같은 시간대에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유 없이 그곳을 지나갔다. 그날의 공기가 그 자리에서만 유지되는 것 같았다.
윤슬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 적은 없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떠올랐다. 그건 기억이라기보다 흔적에 가까웠다. 한 번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는 자국. 정규는 그것을 각인(刻印)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