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서야 윤슬은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재활은 길었고, 치료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버텼다. 움직임에는 큰 불편이 없었지만, 몸 곳곳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말은 여전히 느렸다. 문장을 다 말하기 전에 숨이 끊기듯 멈추는 때도 있었다. 그래도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윤슬은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 겪을 고통은 여기서 다 겪었을 거라고. 그러나 그땐 그것이 큰 착각인 줄 몰랐다.
그녀가 퇴원 후 처음 한 일은 옷장을 여는 일이었다. 화장대 위의 파우더와 립스틱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윤슬은 오래된 옷들을 꺼내 입어보았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서고, 다시 앉았다. 여름이 막 지나 긴팔과 긴바지로 흉터를 가릴 수 있었다. 말투는 여전히 어눌했지만, 입을 다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묶고 밖으로 나갔다.
시내는 사람들로 붐볐다. 노을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윤슬은 한참을 걸었다. 음식 냄새, 웃음소리, 버스 소리, 전광판의 불빛. 오랜만에 느끼는 세상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한때 자신이 그 속에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슴속 어딘가가 조용히 울렁였다.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지만, 윤슬은 그것을 외면했다. 그저 가을이 와서 그런 거라고, 계절 탓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이제 자신에게 뜨거운 사랑은 오지 않을 거라고. 작년 겨울, 짧게 스쳐 갔던 그 남자조차도.
정규는 새 직장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업무는 바빴고, 사람들은 무난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식당에 갔다가 커피를 마시며 돌아왔다. 회사 근처의 거리는 낯설지 않았다. 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갔다.
이따금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는 대부분 거절했다. 특별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했다. 가끔 억지로 자리를 나가기도 했지만,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정규의 시선은 종종 다른 곳에 머물렀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이 이 자리에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무난했지만, 감정은 깊지 않았다. 연애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감은 없었다. 그는 노력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주변의 권유로 시작된 만남들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여자라는 존재 자체에 무심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규는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잊으려는 노력도, 붙잡으려는 의지도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는 그걸 잊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정규는 윤슬과 연락이 끊긴 뒤로도 종종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거리를 걸었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도 그 근처에서 잡았다. 퇴근 후에는 혼자서 그녀와 함께 갔던 식당 앞을 지나기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거리에 서 있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함께 인파 속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정규는 놀라 뒤를 돌아봤다. 모르는 여자였다.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정규는 짧게 대답했다.
“네,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까부터 친구분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여자친구 있는 사람 같진 않던데요. 그리고 제가 그 정도로 마음에 안 드세요?”
정규는 잠시 여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대화를 길게 끌고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연락처만 주세요. 그냥 친구로 지내도 되잖아요.”
정규는 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문득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홍대의 겨울밤,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던 자신. 말이 앞질러 나가던 그날의 감정. 그리고 윤슬의 눈빛.
옆에 있던 친구가 작게 말했다.
“야, 저 정도면 고맙다고 연락처 줘야지.”
정규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입력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정규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윤슬의 시선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 윤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보니 모르는 남자였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고, 윤슬은 순간 몸이 굳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대답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조금 떼었다가 곧 다물었다. 말이 흐트러질 것을 알고 있었다.
윤슬은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손을 들어 조심스레 거절의 뜻을 보였다. 남자는 대화를 이어가려 했고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윤슬은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도 눈길을 둘 곳이 없었다.
남자의 접근이 계속되자 윤슬은 몸을 돌렸다. 인파 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동작은 빠르지 않았다. 보호대를 찬 다리는 균형을 잃었고, 한쪽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금세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골목을 벗어난 윤슬은 건물 벽에 손을 짚었다. 숨이 일정하지 않았다. 몇 분 정도 그 자세로 서 있었다. 결국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은 뒤, 신발을 벗는 속도도 느렸다. 거울 앞에 잠시 섰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외출은 그날로 끝이었다. 며칠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무렵, 오래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우연히 길을 걷다 윤슬이 작년 만났던 남자를 보았다고 했다. 이름은 몰랐지만, 겨울밤에 번호를 묻던 그 남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자가 먼저 다가와 번호를 묻는 장면이었다고 했다.
윤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 오래 머물렀다.
정규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이름이었다. 윤슬은 창밖을 바라봤다. 거리의 불빛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녀는 커튼을 닫았다.
정규가 자신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윤슬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결심만 남았다.
다음날 밤, 윤슬은 한껏 꾸민 채로 집을 나섰다. 상처가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고, 머리를 정돈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여러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윤슬은 그 시선을 느꼈다. 오랜만이었다.
잠시 뒤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윤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를 묻는 말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몇 명과 번호를 주고받았다. 마치 할당량을 채우듯 행동했다.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기 전, 그녀는 휴대전화를 켰다.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었다. 윤슬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 화면의 불빛만이 방 안을 비췄다.
오랜만에 데이트 약속이 잡힌 날, 윤슬은 미리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로 했다. 메시지를 보내자 남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붙잡아주는 듯한 말이었다. 윤슬은 그 말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약속 당일, 윤슬은 신경 써서 꾸미고 정해둔 장소로 갔다. 저 멀리 남자가 다가왔다. 윤슬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남자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윤슬은 그 변화가 착각이기를 바라며 웃었다. 남자는 인사를 받으며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의 사이에 작은 간격이 생겼다.
식당으로 가려던 방향에서 남자가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윤슬이 말했다.
“가…기…로 한… 식…당은… 이쪽…”
“아, 내가 어제 고기를 먹었는데 좀 체했어. 오늘은 다른 데 가자.”
남자는 예정에 없던, 조금 구석진 식당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윤슬은 따라갔다. 남자의 걸음은 일정했고, 그녀의 속도에 맞추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한 뒤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화는 자주 끊겼다. 술잔은 빠르게 비었다. 윤슬은 술이 오르자 남자의 팔에 살짝 기대려 했다. 남자는 놀란 듯 멈췄다가 천천히 다시 걸었다.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듯,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남자의 집 앞이었다. 문이 닫히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행동만 있었다. 둘의 온도는 맞지 않았다.
윤슬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그날 밤, 방 안에는 말이 없었다. 온도만 남아 있었다.
관계가 끝나고 방 안에는 침묵만 남았다. 남자는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의 리듬이 어색하게 일정했다. 윤슬은 그가 자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윤슬은 택시를 잡아 타고 창가에 기대었다. 창밖의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눈가가 젖었지만, 닦지 않았다. 택시 기사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계산만 하고 내렸다.
다음날, 남자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윤슬도 먼저 연락하진 않았다. 그 뒤로 비슷한 관계가 몇 번 더 이어졌다. 번호를 주고받고, 술자리를 가지고, 다시 모르는 집에서 새벽을 맞는 일이 반복됐다.
술은 점점 잔을 채우는 속도보다 비워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가던 장소를 다시 가고, 같은 시간대에 같은 길을 걸어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연락하던 남자들은 오래 남지 않았다. 사람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기보다, 믿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약속은 미뤄졌고, 미뤄진 약속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연락 목록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하나씩 아래로 밀려났다. 답장이 오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시작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 안은 늘 조용했다. 불을 켠 채로 잠들기도 했다. 거울 앞에 서면,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반사된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 표정은 거의 없었고, 눈은 쉽게 피로해 보였다.
윤슬은 가끔 아무런 계획 없이 하루를 보냈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넘기다 밤이 오는 날도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다가 대답하지 않고 돌아누웠다.
병실 생활을 떠올리는 일도 생겼다. 규칙적인 일정, 움직임을 도와주는 손길, 주어진 진단서와 처방전. 그 생활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변하지 않았다. 윤슬은 그 공기 속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