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정규에게 적극적이었다. 말투는 밝았고 웃음은 잦았다. 정규의 표정 하나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붙이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규는 처음엔 당황스러워했지만, 몇 번의 만남을 거치며 그녀의 솔직함에 익숙해졌다.
정규와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초반의 정규는 데이트 중에도 종종 주변을 살폈다.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거나, 사람 많은 곳에 들어서면 한동안 대화가 흐트러졌다. 시선은 그녀에게 있었지만, 방금 지나간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 가끔 스쳤다.
그녀는 그런 정규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한 매력쯤으로 받아들였다.
“자기야. 그때 왜 거짓말했어? 여자친구 있다고.”
“그냥… 그땐 누구랑도 연애하고 싶지 않았어.”
정규는 오래된 기억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녀와 있을 때만큼은 괜찮았다.
그녀는 정규에게 헌신적이었다. 약속 시간을 거의 늦은 적이 없었고, 대화를 이끌었으며, 정규가 무뚝뚝한 날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정규는 그런 면을 편안하게 느꼈다. 강한 설렘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정규는 눈앞의 연인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믿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교제한 지 거의 1년이 되어 가도록 큰 다툼이 없었다. 정규는 그녀의 행동에 특별한 불만이 없었고, 그녀 역시 정규의 무심한 태도에 이유가 있을 거라 스스로 이해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난한 연인처럼 보였고, 주변에서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보통의 연인과는 달랐다. 그녀는 정규가 가끔 보이는 냉소적인 표정과 대화 중에 멈칫하는 순간들이 마음에 걸렸다. 첫 만남 때도 느꼈던 그의 일정한 온도, 변하지 않는 미지근함이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관계가 쉽게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늘 따라붙었다.
정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맞추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한다는 걸. 정규는 그 침묵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써 밝게 굴 필요도, 억지로 뜨겁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태도는 일관됐고, 그 일관됨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들은 큰 문제 없이 만났지만,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평온함 아래에서 작은 틈이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정규는 그녀와 함께하는 데이트에서 홍대 거리를 피하려 했다. 연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지만, 정규에게 그곳은 오래된 장면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굳이 다시 바라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혹시라도 윤슬을 마주치게 된다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정규가 특정 장소만 유독 자연스럽게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회피가 마음에 남았다. 그 말을 묻지 않고 연애를 이어간다면, 이 관계는 더 멀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별일지라도, 이제는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년 기념일을 핑계로 그녀는 홍대 거리를 약속 장소로 잡았다.
그날 밤, 둘은 다른 연인들처럼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퍼져 있었고, 거리의 불빛이 일정하게 흔들렸다. 그날따라 정규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오래전에 알고 있던 감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시감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는 여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 아래서 머리를 넘기던 동작, 걸음의 리듬, 몸의 방향. 정규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본인도 모르게 그녀의 팔에서 팔짱을 천천히 풀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정규는 짧게 “아는 사람이 보였던 것 같아. 잠시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숨은 일정하지 않았다. 등을 곧게 펴고 걸어가던 모습은 멀리서 보면 꼭 잃었던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정규는 그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속도가 느려졌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윤슬은 정규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듯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가볍게 흘렀고, 표정은 편안했다.
정규는 입술을 조금 열었다가 곧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방향을 틀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자친구에게 돌아갈 때까지, 발걸음은 일정했지만 속도는 처음보다 훨씬 느렸다.
윤슬은 사고 이후 줄곧 홍대 거리를 피해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곳을 종종 찾았다. 처음에는 다리를 회복하기 위한 산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습관이 되었다. 사람 많은 시간대를 골라 걸었고, 비슷한 길을 반복했다.
가끔은 정류장 앞에서 잠시 멈춰서기도 했다. 그날 처음 번호를 건네던 정규를 떠올리고 싶어서라기보다, 그 순간의 공기가 문득 생각날 때가 있었다. 윤슬은 자신이 그 감각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저 “여기가 익숙해서”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걸음을 이어갔다.
그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방황하는 생활은 여전히 길게 이어졌고, 사람을 믿지 않는 태도는 더 단단해졌다. 그녀는 그 생활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오히려 텅 빈 쪽으로 더 깊게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다.
이건 살아 있기 위해 필요한 일일 뿐이라고.
그날도 윤슬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 날은 아니었다. 인파가 많았고, 조명은 겨울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가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보았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그때 멀리서 낯익은 어깨선이 스쳤다.
정규였다.
그 옆에는 누군가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윤슬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아주 천천히 틀었다. 일부러 우회하듯 골목 쪽으로 몸을 옮겼다. 속도는 일정했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다만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 길에서 흔히 하던 대로 머리를 넘기고, 웃으며 친구에게 하듯 말하는 시늉을 했다. 일부러 밝아 보이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정규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을 때, 윤슬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았다. 곧 다른 남자가 다가왔고, 그녀는 그의 말에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몇 걸음 뒤에서 누군가 멈춰서는 인기척이 있었다. 윤슬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