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의 여자친구는 그날, 결국 무너졌다.
기념일이면 누구나 조금 더 애쓰기 마련인데, 정규는 여전히 주변을 둘러봤고, 대화 중에도 시선이 멈추는 곳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번 느끼고도 모른 척 넘겼던 그의 진심이, 그날은 도망치지 못할 형태로 눈앞에 드러났다.
한참을 걷다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어딘가 결심한 사람처럼,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정규가 돌아보자 그녀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어.
자긴…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정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랑해달라고 요구하려는 거 아니야. 억지로 붙잡을 생각도 없고.
근데… 하나만 묻자.”
잠시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섞여 스쳐 지나갔다.
“자긴, 나 볼 때마다… 항상 ‘그 너머’를 봤어. 내가 아닌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빛이었어. 그게… 누구였어?”
그녀의 질문은 울음도, 원망도 아니었다. 확인하려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 참고 눌러왔던 의심이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다가왔을 뿐이었다.
정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야말로 정답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정규의 휴대폰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했지만, 그는 화면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코트만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기념일 데이트를 망쳤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마음에 오래 남지 않았다. 스스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며 관계를 이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되는 편이 낫다고 조용히 결론 내렸다.
방 안은 고요했고, 천장 위의 어둠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윤슬의 모습만 물결처럼 번졌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녀는 거의 달라진 듯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조금은 다른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소한 변화조차 그의 마음을 다시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왜 하필 이 사람만 이렇게 오래 남아 있는지, 왜 오늘 다시 본 그 순간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는지 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리움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되고, 궁금함이라고 하기엔 감정의 무게가 지나치게 컸다.
정규는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을 떨쳐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도 나를 떠올렸을까?’, ‘그 거리엔 자주 갔을까?’, ‘아까 그 남자는 누구였지?’ 같은 질문들이 얇은 파도처럼 반복되어 밀려왔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갈수록 마음은 더 복잡해졌고, 결국 한 가지 결론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다시 나가보자. 날이 되는 대로, 그 거리로. 그 생각만이 지금 그의 마음을 잠시라도 조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윤슬은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왜 갑자기 심장을 빠르게 만드는지, 그리고 왜 하필 다른 남자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규가 자신에게 그만큼 특별한 존재였던가, 아니면 오랜 혼란 속에 잠긴 감정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것뿐일까. 그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정규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감정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걸렸다. 흉터가 남은 몸, 어눌해진 말투, 때때로 느껴지는 불안정한 감정. 만약 그런 자신을 본 정규가 실망하고 돌아선다면, 그 순간 그녀는 다시 완전히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윤슬은 그 두려움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래전의 모습으로 거리를 걷는 꿈을 꾸었다. 사고 전의 몸, 사고 전의 표정, 사고 전의 말투. 손에 든 휴대폰 화면엔 정규의 이름이 떠 있었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이라 꿈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사고는 다시 찾아왔다. 당시와 비슷한 오토바이가 골목을 돌아 그녀 쪽으로 돌진했고, 저 멀리 정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도와달라고 외치려 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사고는 그대로 재현되었다. 정규는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져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깬 윤슬은 베개가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불은 식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괴로운 사실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미 겪은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놓았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겨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공기에는 묘하게 가벼운 기운이 떠 있었다. 정규는 오래 머뭇거리던 끝에 다시 그 거리로 나갔다.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기보다는, 오래 묻어둔 말을 한 번쯤 꺼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본인은 괜찮은지. 묻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주저 없이 쏟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보고 싶었다.
같은 시간, 윤슬도 집을 나섰다. 이유를 따져보면 설명할 수 없었다. 기대감 때문인지, 견디기 힘든 혼란 때문인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걸어나가고 싶었다. 정규를 다시 볼 수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고, 만약 세상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녀를 다시 붙잡아 줄 힘을 준다면 그게 정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의 봄바람은 조용했고, 벚꽃은 막 지기 시작해 거리에 부서지듯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가는 얼굴로 거리를 지나갔다. 카페 앞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가로수 사이로 빛이 번져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서로 다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의 속도와 타이밍은 이상할 정도로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벚꽃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뒤,
정규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야 너머, 사람들 사이로 윤슬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윤슬도 마찬가지였다.
흘러가는 인파 속에서 정규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빛처럼 떠올랐다.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지고,
빛과 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기억에만 존재하던 얼굴이,
오랫동안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감정이,
그 자리에서 다시 선명해졌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서늘한 그림자와 따뜻한 햇살이 뒤섞인 그 봄날,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서로를 향해 흘러온 두 개의 흐름이
마침내 한 지점에서 합쳐지는 순간처럼.
벚꽃이 스치듯 지나간 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정규의 시선은 윤슬에게 닿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윤슬 역시 주변 인파에 휩쓸릴 듯하면서도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지만, 굳이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정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뒤, 윤슬도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좁혀질수록 거리의 소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래전 잊어버린 리듬으로 채워져 갔다. 가까워지자 윤슬은 순간적으로 숨을 고르는 듯했다. 떨림이 들키지 않길 바라는 몸짓이었지만, 정규는 알아차렸다. 그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한 번의 호흡을 더 했다.
둘은 서로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봄바람이 윤슬의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밀어냈고, 정규는 그 익숙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던 얼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표정들이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윤슬이 먼저 입을 떼려 했지만 목소리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정규도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주 조용한 말투로 먼저 말했다.
“오랜만이네.”
정규의 인사에 윤슬은 대답하려 했지만, 입을 여는 순간 목소리가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말은 자꾸 끊겼고, 윤슬은 자신의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고, 어색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오래 기다린 재회를 마주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태도는 윤슬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윤슬은 더 말을 잇기 어려워 휴대폰을 꺼내 준비해둔 메모를 정규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짧게 정리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사고가 있었어. 많이 크게.”
“그 뒤로 말이 잘 안 돼.”
“한동안 많이 방황했어.”
그리고 마지막 문장.
“미안해. 보고 싶었어.”
정규는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손으로 직접 받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문장을 다 읽은 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어떻게든, 다 괜찮아.” 그의 표정에는 놀람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오래 기다린 사람을 다시 마주한 듯한 차분함만이 있었다.
윤슬은 그 표정을 보자 미세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오래 붙잡아온 두려움이 서서히 풀리는 듯했고, 눈가가 뜨겁게 차오르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벚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거리를 스치는 소리는 점점 흐릿해졌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