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류(合流)-下

by 홍정교

둘은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음악은 낮았고,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디에서 지냈는지, 서로가 모르는 시간의 조각들을 차분히 이어 붙였다. 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때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소소한 이야기부터 아무도 알 필요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둘은 밥도 먹지 않은 채 계속 말만 주고받았고, 어느새 카페 안의 조명이 서서히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해가 기울고 있다는 신호였지만 둘 중 누구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서로의 얼굴만으로도 몇 시간을 채울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옆에 누군가 있는지, 서로의 현재가 어떤지. 묻는 순간, 이 짧은 재회가 다시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진실은 늘 관계를 분명하게 만들었고, 분명해지는 순간 다시 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윤슬은 자신의 처지를 모두 털어놓았음에도 정규에게 더 바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받아달라고 하기에 자신이 지나치게 망가져 있다는 죄책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정규 역시 조심스러웠다.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관계가 있었고, 그 사실이 이 순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어느 정도 기울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둘은 창밖이 어두워진 뒤에서야 자리를 정리했다. 마치 긴 연극의 마지막 장면처럼, 종소리 하나 없이 막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봄밤의 바람이 서늘하게 스쳤다. 정규는 “다음에 또 보자”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말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단 한 번의 만남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정규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잠시 집 앞으로 나와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예감해온 결말이었고,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오늘 꼭 해야 하는 얘기라면…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체념에 가까운 부탁이었지만, 정규는 단호했다.

“잠깐이면 돼. 나와줘.”


잠시 뒤, 그녀가 현관 앞으로 내려왔다. 인사도 하기 전부터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듯, 그녀는 정규를 보자마자 숨을 고르고는 억눌러왔던 말을 쏟아냈다. 한 번도 모질게 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넌… 진짜 쓰레기야.”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사이코패스 같아.”
“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했어?”


거친 말들이 이어졌지만, 정규는 부정하지도, 변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 마음에 얼마나 어설프게 머물렀는지도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 덮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잦아들었을 때, 정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서로가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던 관계였지만, 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단어를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둘 사이에 남아 있던 감정은 더 이상 사랑도, 미움도 아니었다.
다만 비워진 마음의 자리를 끝내 채우지 못한 채 흩어져가는 이야기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의 관계는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정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비워둔 자리로 다시 어떤 흐름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다음 날, 정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도 화면에 떠 있는 문장들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윤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데이트 코스를 훑어보고, 윤슬처럼 언어적·신체적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대응법이나 행동 수칙까지 검색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고, 어떻게 해야 부담을 주지 않을지, 작은 실수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왜 이토록 신중해졌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그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회사 사람들도 눈치챘다. 누군가는 “요즘 좋은 일 있어?”라고 장난스럽게 물었고, 정규는 짧은 웃음으로만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그는 시계를 볼 때마다 퇴근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루가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오늘도 윤슬을 만나고 싶었다. 어제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어버린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같이 걷고, 같이 얘기하고, 그녀의 속도를 조심스럽게 맞추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느끼는 자신이 오히려 신기했고,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윤슬은 정규에게서 “퇴근하면 볼 수 있을까?”라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잠시 휴대폰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못했다. 대답은 이미 마음속에서 나와 있었다. “응.” 너무 간단한 한 글자였지만, 그 짧은 대답을 보내는 데에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전보다 달라진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기대도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그날 이후 정규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오래 잠겨 있던 물이 다시 움직을 때처럼 잔물결이 일었다.


만남을 준비하며 윤슬은 몇 번이고 거울 앞에 섰다. 화장을 고치고 옷을 바꾸고 머리를 만지며, 다시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다른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꾸미는 게 의미가 있을까? 혹시 너무 기대하는 건 아닐까? 그는 어제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 모든 질문을 덮어버리는 감정이 있었다. 설렘. 어쩌면 무모하고, 어쩌면 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감정. 그런데도 그 느낌이 오랜만에 살아 있는 자신을 확인시켜줬다.


곧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윤슬은 심호흡을 했다.
"예전의 나는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떨렸고 가슴은 계속 빠르게 뛰었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저녁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윤슬은 아주 잠깐, 사고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밝았던 얼굴, 빠른 걸음, 자신감 있는 눈빛. 그 모습은 이제 과거에 남아 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때의 자신이 아주 조금 돌아온 것만 같았다. 재회가 준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규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이 두려움보다 더 큰 용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떨림을 품은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늘이 다시 시작될지, 아니면 또 다른 상처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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