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윤슬의 상황상 정규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출근도, 퇴근도 윤슬의 집에서 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같은 공간에 있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정규는 이상할 만큼 충만했다.
퇴근 후 정규는 곧장 윤슬에게로 돌아왔다.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별다른 계획이 없어도 둘은 서로에게로 향했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몸을 겹쳐 시간을 보냈다. 항상 붙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연인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둘은 그 어떤 관계보다 밀도 높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정규는 윤슬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겪어온 시간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곁에 있을 때만큼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더 잘하려 애썼고, 더 많이 품으려 했다. 그 노력이 부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윤슬도 알고 있었다.
윤슬 역시 달라지고 있었다. 이전에 남자들에게 보였던 방어적인 태도 대신, 정규에게만큼은 자신의 약한 부분까지도 숨기지 않았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지만, 정규 앞에서는 그 두려움마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가장 깊숙한 얼굴을 보여주며,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둘은 때때로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고, 사람이 붐비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줄을 서서 커피를 사고, 별 의미 없는 농담에 웃었다. 인생네컷 앞에서는 괜히 한 컷 더 찍겠다고 투닥거렸고, 화면 속에 함께 담긴 얼굴을 보며 서로를 놀렸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하루를 채웠다.
둘은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찍는 커플이었다. 윤슬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오랜만이었고, 정규는 그런 윤슬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다. 서로의 얼굴이 프레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게 좋았다. 빛이 잘 드는 카페, 해 질 녘의 골목, 아무 계획 없이 걷다 멈춘 길 위에서도 휴대폰을 꺼냈다. 둘 다 비주얼이 뛰어났고, 사진 속의 둘은 그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윤슬은 한동안 SNS를 하지 않았다. 사고 이후 자연스럽게 계정을 지웠고, 다시 만들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다 정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계기로, 조심스럽게 새 계정을 만들었다.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사진이 올라가고 나서 반응은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오래 연락이 없던 사람들이 “요즘 좋아 보인다”는 말을 건넸고, 모르는 이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이어졌다. 윤슬은 그 메시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 반응들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세상 안에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정규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이 화면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정규 역시 그런 윤슬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린 사진은 아니었지만, 보여도 괜찮을 만큼 단단한 사랑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 동안 둘은 정말로 행복했다. 불안을 애써 들추지 않아도 되었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함께 웃고, 함께 잠들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일상이 자연스러웠다. 그때의 둘은 사랑이 자신들을 충분히 감싸주고 있다고 믿었다. 아직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정규는 가능한 한 평소의 삶을 유지하려 했다. 회사에서의 일, 친구들과의 만남, 학교 동창들과의 관계까지. 이전까지 당연하게 이어오던 인간관계들을 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음은 늘 윤슬에게로 돌아왔다. 혹시 혼자 있는 건 아닐지, 오늘은 몸 상태가 어떤지, 말 한마디에 상처받지는 않을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약속을 미루고, 연락을 늦게 확인했다. 친구들이 왜 요즘 얼굴 보기 힘드냐고 물으면 대충 웃어넘겼고, 모임이 겹치면 망설임 없이 윤슬을 택했다. 그 선택이 희생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윤슬이 혼자 감당해온 시간들에 비하면, 자신의 포기는 너무도 사소한 일처럼 느껴졌다.
정규에게는 윤슬을 향한 미안함과 걱정이 늘 함께였다. 그녀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겪어온 과거를 대신 짊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윤슬만을 바라보려 애썼다. 다른 곳으로 시선이 흐르지 않도록,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루의 중심을 그녀에게 두었다.
윤슬 역시 그런 정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고 이후의 시간과 경험은 그녀의 자존감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했고, 그 빈자리는 사소한 불안으로 쉽게 드러났다. 정규의 연락이 조금만 늦어져도, 퇴근 후 바깥 약속이 생기기라도 하면 윤슬의 마음은 금세 요동쳤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왜 연락이 없었는지 묻고, 왜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갔는지 따졌다.
함께 데이트를 하는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윤슬은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듯, 연인 사이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에게 들은 말, 혹은 정규의 반응을 떠보는 질문들. 그 말들이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불안이 더 앞섰다.
정규의 헌신적인 태도 역시 윤슬에게는 마냥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 믿음에 기대었다가 다시 혼자가 될까 봐, 애써 모른 척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리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아무 일 아니라는 태도로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그럼에도 정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윤슬의 말과 행동 속에 담긴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그녀가 겪어온 시간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하려 했고, 기다리려 했다. 아직은,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정규는 사회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윤슬의 리듬에 최대한 자신을 맞추려 했다. 회식이 길어질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했고, 약속이 생기면 몇 번이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럼에도 윤슬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굳어지면, 그는 그날 밤을 온전히 편히 보내지 못했다. 무엇이 부족했는지, 어느 말이 상처가 되었는지, 혼자서 수십 번 되짚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웠고, 설명하는 순간 윤슬의 상처를 대신 말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윤슬은 점점 더 정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의 하루가 궁금했고,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함께 있을 때는 안도했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불안의 근원은 단순히 정규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남자에 대한 불신,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겹쳐 있었다.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그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마음이 윤슬을 자주 흔들었다.
그렇게 둘은 점점 더 서로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바깥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둘만의 세계는 단단해지는 대신 좁아졌다. 정규는 윤슬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 조심스러워졌고, 윤슬은 그 조심스러움을 붙잡으며 더 깊이 기대었다.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행복은 완벽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웃음이 이어졌고, 함께 있는 시간이 당연해질수록 윤슬의 마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정규가 곁에 있는 순간뿐 아니라,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같은 온도로 자신을 생각해주길 원했다. 그 기대는 요구의 형태로 드러나기보다는, 조심스러운 서운함과 반복되는 확인으로 나타났다.
윤슬은 정규에게 더 많은 말을 기대했고, 더 많은 시간을 원했다. 그가 바쁘다고 말할 때면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잠시였고, 그 확신은 자주 다시 증명되어야 했다. 그녀 자신도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이 계속해서 앞섰다.
정규는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윤슬의 기대가 커질수록 그는 더 애쓰게 되었고, 애쓸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벅차올랐다. 부담이라는 말로 규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하루를 마치고 혼자 남는 시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남았다. 그 피로는 윤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행복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고, 윤슬의 기대를 외면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정규는 계속해서 맞추고, 채우고, 기다렸다. 윤슬 역시 정규의 그런 태도에 더 깊이 기대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어느새 숨을 조금씩 가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만은 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