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消盡)-下

by 홍정교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위로가 아니라 버텨야 할 일이 되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점점 증명해야 하는 것이 되어갔다. 함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반복해서 확인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 것.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늦어지면 의미가 퇴색되는 의무처럼 쌓여갔다.


윤슬에게 그 증명은 안심의 수단이었다. 사랑이 눈앞에 있어야 믿을 수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다시 흔들렸다. 그래서 더 자주 확인했고, 더 많이 기대었다. 그 마음이 상처에서 비롯된 것임을 정규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정규에게는 그 과정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는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둘 뒤로 미뤘고, 자신의 피로와 감정을 점검하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끼게 되었다. 윤슬을 지키는 일이 삶의 중심이 되었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하루를 마치고 남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마음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버텼고, 더 붙잡았다. 사랑이 끝나서 지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로.



그날은 정규의 오랜 친구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고, 결혼식이 끝난 뒤 뒷풀이에 참석하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었고, 다들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였다. 대부분은 연인을 데려온 자리였지만, 정규는 혼자였다. 윤슬이 그런 자리를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선택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전하고, 그게 맞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 사이 휴대폰이 몇 번이고 울렸다. 윤슬이었다. 언제 들어오는지, 지금 어디인지, 아직도 거기인지. 처음엔 짧게 대답했고, 곧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리를 비켜 통화를 하면서도 정규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축하의 자리에서, 오래간만의 술자리에서조차 마음을 온전히 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서서히 지치게 했다.


결국 정규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윤슬의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걱정과 서운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녀는 왜 연락이 늦었는지, 왜 이렇게까지 늦게 들어왔는지를 물었다. 정규는 처음엔 설명하려 했다. 친구의 결혼식이었고, 뒷풀이였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었다고. 하지만 그 말들은 곧 변명이 되어버렸다.


그는 처음으로 화가 났다.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끝이 날카로워졌다. 이미 여자친구들을 데려오는 자리였음에도 혼자 나갔다는 사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확인받아야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해해주길 바랐던 마음이, 이해받지 못했다는 감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날의 다툼은 오래가지 않았다. 윤슬은 울었고, 정규는 사과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마무리였다. 하지만 정규는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그는 처음으로, 이 관계 안에서 숨이 막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직은 누구도 끝을 말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정규는 약속을 잡을 때마다 먼저 눈치를 보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언제쯤 돌아올지를 미리 계산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졌고, 설명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점점 자신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접어두는 법을 배워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렸고, 반복되는 선택 앞에서 마음은 서서히 닳아갔다.


윤슬은 서운함을 말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처음에는 확인처럼 들렸던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되었다. 정규는 그 질문에 매번 같은 마음으로 답했지만, 대답이 쌓일수록 의미는 점점 가벼워졌다. 사랑을 증명하는 말은 많아졌지만, 그 말들이 서로를 안심시키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연애의 후반부로 갈수록 윤슬은 헤어지자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실제로 떠날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붙잡아 달라는 신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은 반복될수록 무기가 되었다. 정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떠올렸다. 설명하고, 사과하고, 다짐하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그는 점점 죄인이 되어갔다.


윤슬 역시 편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정규를 몰아세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늘 잠시뿐이었다. 둘은 서로를 붙잡고 있었지만, 그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


3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서로를 이해하기에, 그리고 서로에게 지치기에도.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사랑만으로 이 관계를 더 끌고 가기에는 이미 많은 것이 소진되어 있었다.



둘은 침대에서도 등을 돌리고 자는 날이 잦아졌다. 같은 공간에 누워 있었지만, 서로의 숨결은 닿지 않았다. 윤슬이 조용히 울다 잠드는 밤도 많았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 달래주었고, 아무 말 없이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밤이 반복될수록 정규는 점점 훌쩍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척하게 되었다. 윤슬이 화장실로 나간 사이, 베개에 남은 젖은 자국만을 확인하고 다시 등을 돌리는 날도 있었다.


정규는 정말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윤슬은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는 그녀의 침묵이 오히려 더 답답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묻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오갔고, 더 묻는 순간 또 다른 다툼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런 밤이 늘어날수록 정규는 종종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가슴만 뛰던 그날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관계의 끝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윤슬 역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 관계가 둘에게 점점 마이너스가 되고 있다는 것, 정규에게 과하게 기대는 연애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기로 했다. 다시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집 밖으로 나가는 날이 늘어났다. 바깥의 공기는 오랜만이었고, 그 변화는 윤슬에게 작은 용기가 되었다.


정규는 그런 윤슬을 보며 안심했다.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도 함께 따라왔다. 윤슬은 여전히 젊고, 여전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어딜 가든 관심을 받았고, 그 사실을 정규 역시 모르지 않았다. 윤슬 역시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규가 아니어도, 자신은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날, 윤슬이 늦은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규가 전화를 걸자, 혀가 꼬인 친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 뒤로 웃음 섞인 소리와 함께,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정규는 걱정이 되어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윤슬은 친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고, 윤슬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날 밤, 정규는 끝내 윤슬에게서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처음에 정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동안 윤슬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사고 이후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어쩌면 그런 윤슬을 끝까지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마음까지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그 생각은 정규를 잠시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날의 일탈은 그를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균열은 관계를 서서히 바꾸어놓았다. 이전처럼 모든 것이 당연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예전과 같은 온도를 기대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일들이 늘어갔다. 감추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솔직함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설명되지 않은 여백이 생겼고, 그 여백은 하루하루 조금씩 넓어졌다. 처음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의 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서히 식어갔고, 3년의 연애를 담담하게 끝냈다. 어느 날 갑자기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보다 버티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싸우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탓하지도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사람들처럼, 조용히 남이 되어갔다.


정규는 마지막으로 윤슬의 집에 찾아갔다. 둘은 오래 마주 앉아 있다가, 결국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품에서 윤슬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고, 곧 정규도 참아왔던 숨을 무너뜨렸다. 함께 있어서 행복했던 순간들, 긴 시간을 버텨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 누구 하나 먼저 꺼내지 않아도, 서로에게 그런 말들이 오갔다. 말들은 조심스러웠고, 그만큼 진심이었다.


“그동안 정말 행복했어.”

윤슬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만나줘서, 견뎌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정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둘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다시는 이렇게 안을 수 없다는 것을. 서로에게 건네는 말이 모두 진심이었기에, 더 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둘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별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 정규는 바깥 공기를 느꼈다. 하필 그날은 첫 만남과 닮은 겨울 날씨였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추웠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정규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둘의 시간은 끝났고,
각자의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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