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의 거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바삐 지나갔고, 그 틈에서 정규는 특별할 것 없는 속도로 걷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마다 숨이 짧게 끊어졌고, 입김은 금세 사라졌다. 그런 풍경 속에서, 그는 문득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떠올리고 있는 듯 보였다.
벌써 2년이 지났다. 그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이별의 순간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다시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그는 아직 답하지 못한 채, 곧 그녀를 만난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헤어진 초반, 그는 불쑥불쑥 그녀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찾아가고 싶었고,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걸까 말까 수없이 망설였다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이미 모든 것을 불태운 뒤였고, 다시 만난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고, 그는 나중에서야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그에게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녀의 존재는 서서히 그의 일상에서 옅어져 갔다. 그는 다시 자신의 하루로 돌아왔고,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만 연애는 여전히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그럴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가끔 그녀의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사랑에 빠지게 했는지 떠올려보곤 했다. 예전처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를 찾으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왜 그에게 그렇게 큰 의미였을까. 왜 그는 자신의 많은 것을 내려놓을 만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흔히 말하는 첫눈에 반한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제짝이 있다고들 한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우연처럼 스쳐가는 관계가 더 많다고 생각했고, 사랑 역시 선택의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을 조금은 믿게 되었다. 그녀와 자신을 떠올리면 더 그랬다.
웃음 코드가 비슷했고, 음악 취향도 잘 맞았다. 가치관은 완벽히 같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방향이 닮아 있었다. 막연히 그리던 미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식당에 앉아 반찬을 집어 드는 순서 같은 사소한 습관들마저도 자연스러웠다. 그런 사람과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어쩌면 그녀는 그의 짝은 아니었나 보다,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제짝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더 붙잡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분명 겉모습에 이끌렸을지 몰라도, 알면 알수록 그녀는 그가 막연히 꿈꿔왔던 여자에 가까웠다. 그를 진심으로 웃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많은 것을 내려놓으면서까지 그 사랑을 지키려 했던 게 아닐까.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그런 사랑이 결국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마음 하나로 현실을 넘어설 수 있고, 사랑이 충분히 크다면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역시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하면 버틸 수 있고, 버티면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은 분명 강했지만, 모든 것을 대신해주지는 못했다. 마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안다. 그 연애가 실패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시간이었고, 동시에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하게 만든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그 사랑을 후회하지도, 다시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한때 그렇게 흘러갔던 물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시선이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흘러갔고, 그 끝에 익숙한 풍경이 놓여 있었을 뿐이다. 주말 밤의 거리,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사람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웃음소리들.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이었다.
조명 아래에서 한 여자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 웃음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모습이 어쩐지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그는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 이유를 굳이 찾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지나가며 시야를 가렸고, 다시 보았을 때 그 자리는 다른 얼굴들로 채워져 있었다. 저 멀리, 윤슬과 닮은 실루엣을 가진 여자가 인파 속으로 스며들 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스쳤고,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입김이 잠깐 피어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