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테 Aug 20. 2020

가족을 잃은 날(1)

하늘은 내 속도 모르고 맑았다

지난 8/16일 오전 10시 56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15일 말복날 늦저녁부터 매상이 조금 올라서 2차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될 때 그래도 나름 선방하며 장살을 마치고 다음날은 쉬는 날이라 모처럼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새벽까지 놀다가 잤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오전 11시에 당근 마켓에 올린 린나이 55인용 가스밥솥을 산다는 분이 계셔서 며칠 전 컨택 후 거래하기고 약속을 잡았었다. 그러고 10시 30쯤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시간 맞춰 가려는데 11시에 보기로 한 거래자가 너무 일찍 나타났다. 그래서 부랴부랴 40분 좀 넘어서 가게에 도착해 창고에서 거래물건을 꺼내어 보내준 후 거래자들이 물건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 전화였는데 별생각 없이 받았다 하지만 통화내용은 너무나 다급한 전화였다 "지금 할머니께서 곧 돌아가실 거 같으니까 작은엄마한테 얘기를 해놨으니 작은엄마랑 합류해서 병원으로 와라"라는 전화였다. 


사실 우리 친할머니는 암투병환자셨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투병생활은 약 10개월 정도 처음에는 대장암으로 시작했다가 폐암까지 전염되어 4 기암 판정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암수술을 두 번 치르고도 많이 회복하는듯하여 나는 그 속도 모르고 그날까지 안심하고 있었다. 


갑작스 로운 위급한 사실에 나는 다급해졌다. 거래자들과 거래를 끝내고 돈을 건네받고 채비를 하려 가게를 잠그고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는 생각을 할 때, 엄마 전화를 받고 10분 후쯤 흘렀을까 아버지 전화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때만 해도 정말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잘 회복 중이셨고 지난달에 우리 가게에 와서 봤을 때만 해도 기력이 쇠하셨던 건 보였지만 회복은 하는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작은엄마는 우리 가게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지금 방학이라 집에 와있는 사촌 여동생도 같이 태우고 와야 했기에 같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차 안에서 그 두 사람은 벌써 훌쩍이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 펑펑 울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때 비로소 이게 현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를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할아버지의 속은 얼마나 애통하고 비통하였을까, 다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눈물은 나질 않았다. 그 와중에 시국은 시국인지라 사망 확정을 받았어도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한다며 저녁 4~6시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간호사 한분이 전달하였다. 가족들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이해는 못했지만 나라에서 정한 방침이니 국민으로서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하며 우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우선 아침부터 밥도 못 먹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시간만 축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아버지들은 할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장례식장으로 향해서 미리 절차를 밞아두고 작은엄마네와 우리는 각자 집으로 향해서 생필품과 필요한 짐들을 꾸려서 시간 맞춰 장례식장으로 향하자고 했다. 


오랜만에 동두천 부모님 집에 갔다. 이런 식으로 오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찌 됐든 최소 16시가 되기 전에 필요한 짐을 꾸려서 기다려야 했다. 갑작스레 장례를 치러야 하니 상복이 있을 리는 없고 예전에 맞춰둔 정장은 살이 쪄서 못 입고 빌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가까운 아웃렛에 가서 사보려고 조금 서둘러 집을 나왔다. 하지만 몸이 남들보다 큰 나는 맞는 사이즈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장례식장에서 빌리기로 했다. 16시쯤 전화가 왔고 예상보단 더 늦어지지는 않아 우리는 바로 장례식장에서 모였고 그 후 상복을 빌려서 치수 재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실 이때까지는 정말 슬픈 것보다는 정신이 없었다. 


첫날 장례식장에서의 시작은 그렇게 했고 조문객이 올 때까지는 그저 어른들이 절차를 다 밞고 처리를 했기에 내가 할 일은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놓은 향로에 향을 꺼지지 않게 계속 향을 피우는 일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편안한 얼굴이셨다. 장례 첫날 할머니가 원하시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추한 모습 없이 큰 고통 없이 그렇게, 그렇게 날씨도 좋은 날 처음으로 가족을 잃은 날이 찾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터닝포인트 나의 일본 워홀 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