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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테 Aug 22. 2020

가족을 잃은 날(2)

자식은 부모 앞에선 늘 죄인이다

https://brunch.co.kr/@ghfjvb465/147


지난 글에 이어서 친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경험을 글로 그것도 시리즈로 쓰는 것은, 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이날의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한 자기 위로임으로, 불편하신 분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날 그렇게 상복으로 갈아입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그새 저녁시간이 다가왔다. 평소보단 이른 저녁이지만 조문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기에 일찍 엄마와 동생, 사촌들과 작음 엄마까지 해서 먼저 식사를 하였다. 나는 장례식 밥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맛있다는 평이 좀 더 있었다.(3일간 똑같은걸 먹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18시가 넘어갈 무렵부터 조문객들이 한분 두 분 오기 시작했다. 사실 2차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될 무렵이었기에 조문객이 많으리라고 생각을 않고 다들 50명 정도 예상했다. 확실히 첫날은 그리 많은 분들이 오시진 않았다. 다만 18시부터 오기 시작해서 21시 넘어까지 뜨문뜨문 오셨다. 외삼촌 와 이모도 왔었다. 나와 동생은 친할머니 영정사진 있는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향을 계속 피우는 일을 하고 상주인 아버지들이 자리에 없을 때 모셔오고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무래도 첫날은 조금 덤덤했었다. 다들 이 상황이 믿기지도 않을 것이고 실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막내 아빠는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옮겨온 할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는데 너무나도 평온하고 편안해 보였다고 해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듯했다. 첫날은 큰일도 없이 그냥 조문객도 발길이 끊어지는 21시 전 상주인 울 아버지와 둘째아버지 두 분이서 술을 드시며 속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때부터 두 분의 감정이 커지고 큰소리도 나고 조금 힘들었었다. 특히 동생 친구들이 늦게 조문하러 왔었는데 그로 인해서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내가 합류해서 조금은 진정시켜드리고 그랬는데 동생 친구들이 가고 나서는 막내 아빠까지 불러서 다시 얘기가 커졌다. 그 시간 즈음 손주, 손녀들까지 여기서 잘 필요는 없다고 어차피 집도 가깝기 때문에 사촌누나 차 타고 4명이서 나왔다. 그 후 사촌 여동생하고 나와 동생은 집이 비슷한 곳에 있어서 내려서 나는 내가 자취하는 집까지 동생과 같이 걸어갔다. 


집에 와서 휴일에 정리하려고 했던 방에 들어가 씻고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들렸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새벽 3시쯤 되었고 그 후엔 어찌 됐는지 자긴 했다 그러다 8시 반쯤 보기로 한 시간에 맞춰서 집합장소로 모여 다시 사촌누나 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입관이 9시 반인데 그전날 비구니 스님들을 초청해 입관을 같이 하기로 했다. 입관 전 스님들이 오셔서 같이 불경도 외고 시간이 되자 자리를 옮겼다. 


차갑게 굳어있는 친할머니의 파란 얼굴 표정만이 밝았다


다들 들어가자마자 오열을 했다. 평생 아버지의 그런 오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나라 잃은 슬픔보다 큰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 이리라.. 특히 나와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사촌 여동생은 손주들 중에 가장 추억도 지낸 시간도 많기에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가장 많이 울었고 가장 많이 힘들어 보였다. 나도 처음 겪는 가족을 잃은 슬픔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인자하고 편안해 보이신 차가운 친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묵묵히 뜨거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구니 스님들의 불경은 계속되고 가져오신 부적을 온몸에 감싸 않으며 극락왕생하시길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친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관을 덮고 육신을 관으로 옮겨드리고 뚜껑을 덮은 후 한 바퀴를 돌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영정사진 앞으로 왔다. 비구니 스님들의 불경에 맞춰서 나눠 받은 프린트 지를 같이 외우며 극락왕생을 기리고 이생에서의 한을 풀어드리는 염불을 드렸다. 아버지는 두 눈을 꼭 감고 합장을 하고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빌고 또 비셨다. 존재의 크기는 마음에 투영되는 것 같다. 그렇게 기세였던 친할머니도 친할아버지도 세월에 흐름에 많이 약해지셨고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 다시 첫날과 같은 조문객 맞이 및 상주들 픽업 등의 심부름 업무를 하였다. 역시 첫째 날보단 둘째 날이 조문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점심 즈음부터 분주해졌다. 가장 오래 친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지낸 나는 계속 옛 생각에 잠겼다. 그 언젠가 어느 날 친할머니께서 통화로 "00야 애기가 보고 싶다" 이 말 한 것도 지금도 생생하고 살아생전 우리 장손 결혼해서 증손주 보는 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하셨는데 그걸 이뤄드리지 못한 恨이 아마도 나에겐 남은 거 같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있는 못난 손주를 부디 용서해주시길... 암투병환자셨는데  하두 괜찮은 기색을 보이셔서 정말 다 괜찮아질 줄 알았던 아니 그렇게 믿고 전화 한 통 자주 해드리지 못한 점등, 처음에는 덤덤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못 해 드린 점과 후회되는 감정이 계속 올라오고 특히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슬픔은 전염이 된다는 걸 이번에 피부로 와 닿았는데 다른 아버지 들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날 몇십 년 만에 모인 친할머니 동생들인 이모할머니들을 보고 옆에서 같이 울컥 이게 되었다.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하지만 가족들의 오열하는 모습에 도무지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인생사 누구 하나 굴곡지지 않은 인생 없다지만 우리 친할머니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고 굴곡진 인생이었다. 


시골촌 동네에서 8남매 중 차녀로 태어나 20살이 되기 전 친할아버지를 만나 갖은 고생을 다하시고 3형제를 낳아 기르시면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던가 왜 할머니가 독해지고 자존심 세고 외롭게 사셨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집안의 흑역사부터 가족 간의 깊은 골과 아버지가 원통해하시는 친할머니의 가슴속 깊은 恨까지,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어릴 때 몰랐던 슬픈 진실들을 알게 되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 어찌하여 그리 사시 었소 이제와 그립고 슬퍼한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지만 참으로 비통하다. 아아 삶의 마지막 순간 친할머니는 어떤 생각이셨을까 다만 가족들의 눈에는 영정사진 속 할머니의 영이 보인다며 좋은 표정으로 있으셨던 거 같다. 나도 미신은 믿지 않지만 내 마음이 만든 환영일지 몰라도 할머니는 꾸준히 나에게 미소를 짓고 계셨다 가끔은 눈시울이 붉어지시기도 하고 그렇게 둘째 날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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