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늪에서 탈출하기

by Josh

우기라 햇빛을 못 보고 산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나가고, 우기라 그런지 전기도 매일 7시간 이상씩 끊기고 엊그제부터는 나의 유심회사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데이터도 끊기고 통화와 문자도 안된다. 와이파이가 터지는 정부 사무실에나 와야 겨우 인터넷이 터지는 이 아찔한 상황 속에서, 나는 우울의 늪에 빠졌다.


처음엔 그냥 좀 불편하다 정도였는데, 어두운 하늘이 계속 이어지면 빨래가 안 마르고 길은 진흙탕이 되고, 집 안은 눅눅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불편이 아니라 무게가 됐다. 몸 위에 따뜻한 담요가 아니라, 움직이면 더 달라붙는 젖은 담요가 숨을 막는 느낌. 숨을 쉬는데도 숨이 시원하지 않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데도 이상하게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버겁다. 날씨는 늘 똑같은 표정인데 내 감정만 혼자 크게 요동친다.


정전은 이상하게 사람을 축소시킨다. 불이 펑하고 꺼지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어든다. 친구가 사준 간이 조명등을 책에 꽂고 책을 읽으려다가도 눈이 피곤하고, 음악을 틀려고 해도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전기 때문에 스스로 핸드폰을 끄고 배터리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마음까지 아끼게 된다. 얼마 전에 들었던 강도가 또 들지는 않을까 괜히 마음을 졸이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밖에 나가서 가드들이 잘 일하고 있나 확인하고, 가드가 없는 걸 보고 화를 버럭버럭 내기도 한다. 전기가 끊기는 건 단지 전기가 끊기는 일이 아니라 오늘 너는 여기 까지만 해라는 통지서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만큼 생각은 늘어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내 하루의 중심이 되는 순간 마음은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더 바쁘게 뛰어다닌다. 문제는 그 바쁨이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 그저 공회전이다.


통신이 끊긴 건 그 공회전에 기름을 부었다. 데이터가 끊기고 통화와 문자까지 막히면, 세상과 연결된 줄이 끊어진다. 그나마 연결이 있을 때는 몰랐던 고요가, 연결이 끊기면 갑자기 고립으로 이름이 바뀐다. 같은 고요인데도 이름이 바뀌면 성격이 달라진다. 평온하던 침묵이 갑자기 심문처럼 느껴진다. “너 지금 어디야?” “너는 괜찮아?”라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길 자체가 막혀서 그렇다. 대답이 막히면 존재도 막히는 기분이 든다. 내가 여기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증명할 수 없을 때, 나조차도 내 존재를 희미하게 느끼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부 고위 공무원들이 있는 사무실은 늘 인터넷이 빵빵하게 터진다. 물론 와이파이지만, 우리 사무실의 와이파이는 안 터지는데 여긴 왜 터지는 걸까? 아무튼 오늘처럼 아침부터 정부 사무실에 와이파이를 찾으러 가는 길은 단지 인터넷을 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뭐랄까 사람이 되러 가는 길 같다. 화면에 작은 글씨들이 흐르고, 메시지가 오고, 회신이 되고, 뉴스가 로딩되는 그 짧은 순간에야 나는 다시 현대인이 된다. 하지만 그 현대는 너무 가늘어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끊긴다. 연결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마음도 안정적이지 않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물리적인 조건에 좌우된다. 우울은 뭔가 내가 나약해서 오는 것 같고, 환경 탓을 하는 순간 내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구겨지는 건 자존심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었다.


사람이 왜 우울해지는지, 나는 여기서 아주 교과서적인 답을 경험으로 배우고 있다. 첫째는 빛이다. 햇빛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요소가 아니라, 몸의 시계를 맞추는 신호다. 빛을 못 보면 잠이 흐트러지고, 잠이 흐트러지면 감정이 흐트러진다. 밤이 와도 졸리지 않고, 아침이 와도 개운하지 않다. 머릿속은 자꾸만 밤처럼 침침하다. 둘째는 리듬이다. 전기와 통신이 끊기면 하루의 리듬이 깨진다. 계획을 세워도 무너지고, 무너진 계획 위에 다시 계획을 세우는 일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실패는 사람을 조용히 갉아먹는다. 나는 이 정도도 못 하네 같은 문장이 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된다. 셋째는 통제감이다. 우울은 슬픔이 아니라 무력감에 가깝다.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느낌, 노력의 방향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느낌. 넷째는 고립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아가지만, 혼자서만 살아가지는 못한다. 연결이 끊기면 감정은 자기 안에서만 순환한다. 순환하는 감정은 점점 농도가 짙어진다. 외부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잠식된다.


그럼에도 우울은 늘 감정의 얼굴로만 온다. 논리적으로 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야, 환경 때문이야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도, 가슴은 그런 설명을 잘 믿지 않는다. 우울은 마음속의 언어도 바꿔놓는다. 내 마음속 해설자가 어느 날부터 비관 전문으로 이직한 느낌이다. 월급은 내가 준 적이 없는데, 이 비관론자는 늘 매일 성실하게 출근을 한다.


우울한 날들 속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한 행동이 무엇인지 떠올려봤다. 이상하게도 나는 멈추는 대신 어떻게든 버티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정전이면 손전등을 찾고, 충전이 될 때 최대한 충전하고, 인터넷이 되는 곳까지 굳이 가서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하지만 우울은 그 사실을 지워버린다. 내 눈에서 내가 한 일을 지우고 너는 아무것도 못 했어라고 자책만 남긴다. 우울할 때는 내가 한 일을 내 눈으로 다시 보게 해줘야 한다. 감정은 과장하는 재능이 있고, 우울은 특히 그 재능이 뛰어나다. 그러니 기록이라도, 체크리스트라도, 아주 사소한 성취라도 붙잡아야 한다. 오늘은 물을 끓였다. 오늘은 발을 씻었다. 오늘은 비를 맞지 않고 돌아왔다. 오늘은 누군가에게 잘 지낸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들이 별게 아닌 것처럼 보여도, 우울한 날에는 이런 것들이 삶의 뼈대다.


우울의 늪은 아주 조용히 사람을 잡아당긴다. 갑자기 확 빠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오늘은 웃음이 덜 나고, 내일은 말이 덜 나오고, 모레는 밥맛이 덜 나고, 그다음은 씻는 게 귀찮고, 그다음은 사람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늪의 경계가 어디였는지 모른 채로 안쪽에 와버린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주변이 다 젖어 있고, 발을 빼려 하면 더 깊이 빠진다. 그때 필요한 건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그냥 뭍에서 버티는 발끝 하나다. 늪에서 나오는 방법은 멋진 다짐이 아니라, 작은 움직임이다. 아주 작게라도 밖으로 향하는 움직임.


무엇보다, 우울한 날들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왜 나는 이 정도로 흔들리지? 같은 자책이었다. 우기, 정전, 통신 문제, 고립. 조건만 보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충분히 흔들릴 만한데도 나는 자꾸만 내 마음을 나무랐다. 마치 내가 감정 없이 기능해야 하는 기계인 것처럼.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빛이 필요하고, 연결이 필요하고, 안정적인 리듬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부족하면 마음이 신호를 보낸다. 지금 너무 어렵다는 내 자신의 신호를 약함으로 읽는 대신 나라는 인간의 시스템 경고등으로 읽으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경고등이 뜨면 차를 욕하지 않는다. 점검하고, 오일을 채우고, 쉬게 한다. 나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내가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비난하는 상사가 아니라 점검하는 정비사가 되는 편이 낫다.


물론 우울은 낭만적이지 않다. 꽤 그럴듯한 문장으로 포장하기엔 너무 실제적이고 너무 끈적하다. 우울의 하루는 대체로 재미없다. 그래서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대체로 재미없다. 드라마틱한 반전은 잘 오지 않는다. 대신 아주 현실적인 반복이 있다. 오늘도 씻고, 오늘도 먹고, 오늘도 조금 걷고, 오늘도 글을 쓰고, 오늘도 잠을 자는 것.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아주 잠깐 하늘이 얇아진다. 구름이 조금 덜 무겁게 보인다. 비가 잠시 멈춘 틈에 바람이 들어온다. 그때 깨닫는다. 아,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었구나. 늪 안에서도 조금씩 발을 빼고 있었구나.


내가 원하는 결론은 우울을 극복해 내는 영웅 신화도 아니고, 이 우울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가진 힘을 다시 확인하고 싶다. 우울이 지워버린 내 노력을 다시 내 눈앞에 놓고 싶다. 햇빛이 없어서 어두운 것이지, 내가 어두운 사람이 된 건 아니다. 전기가 끊겨서 멈춘 것이지, 내가 무가치해서 멈춘 건 아니다. 연결이 불안정해서 불안한 것이지, 내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조건이 마음을 흔들 수는 있지만, 그게 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여기서도, 이 눅눅한 공기와 불규칙한 정전과 불통의 통신 속에서도, 하루를 살아낸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리고 그 충분함을 인정하는 순간, 힘은 어디선가 다시 올라온다. 가늘고 작지만 분명히 올라온다. 내 안에는 여전히 나를 끌어올릴 근육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 나의 힘은 충분해, 이제 힘을 내기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