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밖에서 숨쉬기

갓생 대신 나로 살기

by Josh

살 수 있는 날을 잃는 건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려고 했다. 일찍 일어나고, 시간을 쪼개고, 계획표를 만들고, 주어진 역할을 완벽히 해내면서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면 적어도 하루를 허비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내 시간이 어딘가로 새어 나가지 않게 손바닥을 꼭 오므리듯이 하루를 꽉 잡으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을 붙잡았는데,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하루는 더 딱딱해졌다. 내가 살아낸 시간이 아니라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 되어버렸다. 눈을 뜨면 오늘의 To Do 리스트가 먼저 떠올랐고, 밤이 되면 오늘은 뭘 남겼지부터 계산했다. 무엇을 얼마나 완벽하게 해냈는지가 곧 나를 증명한다고 믿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감각이 들면 그날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운 건 지나버린 '날'이 아니라,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이유가 정말 살 수 있는 날을 잃는 게 아까워서일까 아니면 누군가 정해둔 잘 사는 기준 같은 것에서 떨어질까 봐 겁이 나서였을까. 열심히 살기 위한 노력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딘가에 끼어들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 잘 산다고 생각해 왔을까. 누가 정해둔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게 왜 더 나은 삶처럼 느껴졌을까.


사회라고 불리는 놈은 아주 친절하게도 기준을 꽤 많이 준다. 나이가 이 정도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하고, 직업은 이런 모양이 좋고, 돈은 이만큼은 모아야 하고, 인간관계는 이렇게 유지해야 하고, 몸은 이 정도는 관리해야 한다는 식의 친절함. 소위 '갓생'을 사는 '잘'사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조건들을 '잘' 갖춘 사람처럼 보인다. 비교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습관처럼 비교하게 되고,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아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이미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은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보여야 할 것 같아서 하는지 구분은 흐려진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자기 계발을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몸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건 내가 원한다가 아니라 이 정도는 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해야 한다가 많아질수록 삶은 단단해지는 대신 무거워졌고, 그 무게는 밖에서 보기엔 성실이나 어른 같은 단어로 치환되지만 안에서는 자주 숨을 막았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묘하게도 끝이 없다. 한 번 맞추면 다음이 나오고, 다음을 맞추면 더 정확한 다음이 나온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잠깐이고, 그다음엔 곧바로 더 잘할 수 있지로 다가온다. 더 잘해야 한다는 문장은 언제나 그럴듯해서, 내가 거절하기 어렵다. 결국 나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기준을 어기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마무리되는 하루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내 감각은 조금씩 납작해졌다.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섞이고, 원하는 것과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뒤엉켰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뭘 원했는지 묻는 일이 귀찮아졌다. 그냥 기준을 따라가면 되니까. 묻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신호가 났다.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었고, 별일 아닌데도 스스로에게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다.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이 마치 조련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더 부지런히, 더 단단히, 더 멀리. 나는 나를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키운 게 아니라, 남들이 좋아할 만한 모양으로 다듬어온 건 아닐까.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애정이라기보다 관리에 가까웠다.


그렇게 버텨가는 와중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친구였다. 별다른 거창한 말을 건넨 적도 없이 그냥 어느 날부터 그 친구의 삶은 다른 장소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사진 속 배경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달라진 것으로 보였다. 전해지는 소식은 길지 않았지만 길지 않은 소식들 사이로 그 친구가 지금 꽤 힘들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꽤 즐겁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순이 묘하게 선명했다. 힘든 건 분명한데 왜 즐거워 보일까. 나는 그 장면을 계속 되돌려 보게 됐다. 피곤한 일상들, 거칠어진 손, 낯선 일, 익숙하지 않은 언어, 불확실한 내일. 그런 것들은 잘 산다는 목록에서 빠지기 쉽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적어도 화면 너머로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처럼 하루를 꾸역꾸역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를 온전히 겪는 사람처럼. 그 차이가 이상하게 크게 다가왔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잘 산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남들이 정해둔 잘 사는 것이었다는 것. 누군가의 기준에 맞게 움직이면 겉으로는 매끄럽다. 설명도 쉽고, 납득시키기도 쉽고, 비난받기도 어렵다. 대신 그 삶은 종종 내 마음의 중심을 비워버린다. 내 마음이 어떤지를 묻기 전에 그 사회라는 놈이 요구하는 모양을 먼저 채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생활 속에서 사라지고 내 역할만 남는다. 나는 나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남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피곤한데도 괜찮은 척하는 것, 괜찮지 않은데도 합리적인 척하는 것,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 그 작은 순간들이 쌓이면, 나는 어느 날 내 감정에 대해 무감해진다. 내 기쁨이 어떤 모양인지, 내 슬픔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내 분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정보가 된다. 해야 하는 일이 항상 우선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은 분명 바쁘고 성실했는데 이상하게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살 수 있는 날을 잃는 건 아깝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정말 아까운 건 무엇일까. 잠을 덜 자고 더 많은 일을 하는 걸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살아있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걸 말하는 걸까. 어느 쪽이 더 아까운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날은 계속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문제는 그날이 내 안을 통과할 때, 내가 거기에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모양으로 하루를 보냈다면, 그 하루는 아까운 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낭비였다.


물론 친구의 삶과 내 삶을 또 비교해 대는 것도 웃기고, 친구의 삶도, 내 삶도 정답은 없다. 지금 당장 늘 가슴팍에 꽂혀있는 사직서를 던지고 어디론가 훨훨 떠난다고 한들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음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도망쳐 떠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하지 않나. 도망친 섬에서 열심히 노 저어 찾아간 육지가 또 다른 지옥이라면? 혹은 달콤한 회유로 내가 여기에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 나는 팔랑귀니까. 익숙한 곳에서 떠나는 것이 모두에게 맞는 선택일 리도 없고 그 선택이 언제나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는 그 친구의 모습이 하나의 증거처럼 보였다. 사람은 기준의 바깥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 불안과 고생이 있어도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쥐고 있으면 어떤 표정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증거 같은 것들.


그 친구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가끔 접하는 그의 소식과 그 삶의 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고 있냐?라는 질문을.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을 미뤄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엔, 나는 내가 가진 결핍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족함, 변덕스러움, 느림, 망설임, 흔들림, 때로는 게으름, 때로는 불친절한 마음. 그런 것들을 들키기 싫어서 나는 더 단정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기준에 맞춘 삶은 내 결핍을 가려주는 옷 같았다. 그런데 그 옷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옥죄었다.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내가 나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더 사회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던 거다. 모양을 맞추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의 눈이 잠시라도 나에게서 떨어질 것 같아서. 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많이 잃은 건 내 시선이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내 마음을 알아채는 감각.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용기. 그건 돈으로 사기도 어렵고 성실함으로 얻기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남으로 살지 않고 나로 살기로. 이 결심은 화려한 계획이 아니라 태도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을 조금씩 내 안으로 옮기는 일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말 대 나는 지금 어떤지 묻는 일. 남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 대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일. 당장 모든 걸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도 나는 친구와 나를 비교하고 앉아있고, 여전히 기준을 의식할 것이고 불안도 느낄 것이다. 다만 그때마다 아주 작게라도 다시 선택하기로 한다. 기준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는 선택. 나로 산다는 건 마음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책임을 버린다는 뜻도 아니라 오히려 더 책임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 감정을 내 것으로 인정하고, 내 선택의 결과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가치로 내 삶을 설명해 보려는 책임. 그 책임은 무겁지만, 적어도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준다. 나는 그 감각이 필요했다. 단단하게 버티는 삶이 아니라, 내가 안에서부터 숨 쉬는 삶.


살 수 있는 날을 잃는 게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문장의 뜻이 달라졌다. 이제 나는 아깝다를 시간의 효율로만 계산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 내가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로만 나를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오늘 내가 얼마나 나로 존재했는지, 얼마나 솔직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싶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조금이라도 오늘은 나로 살았다에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나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족한 채로, 흔들리는 채로, 때로는 멈추는 채로도 괜찮다고. 나의 속도와 나의 방향이 남들의 지도와 다를 수 있다고. 그 다름을 실패로 부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조금씩 나에게 허락을 주기로 했다. 그 허락이 쌓이면 나는 더 이상 남의 기준을 빌려 나를 살릴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잘 사는 건, 남들이 인정하는 모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앎이 단지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게, 내 하루의 방향으로 옮겨놓으려 한다. 남으로 살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연습할 것이다. 오늘도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날을 정말 내 날로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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