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8코스 ▏치유
겨울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한기가 느껴지는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주로 따뜻한 실내를 찾는다. 하지만 그런 계절에 오히려 길 위로 나선다. 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바다는 겨울 특유의 묵직한 푸름으로 마음을 감싼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해파랑길 48코스, 가진항에서 거진항까지 이어지는 약 13.6km의 길을 걷기로 한 날도 그런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가진항은 고요했다. 어민 몇 명이 그물 손질을 하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고, 항구 주변에는 바닷바람에 날리는 비린내와 갓 마른 명태 특유의 향이 감돌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어딘가 들뜬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출발은 가진항 왼편의 오솔길에서 시작됐다.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길을 걷는다는 것’ 그 자체가 오늘의 목적이 되었다.
오솔길은 이내 도로와 만나 다시 일상으로 이어졌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넓은 갯벌과 얕은 해안선이 펼쳐졌다. 겨울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녔다. 몇 마리는 갯벌에 내려앉아 부리를 물속에 찔러 넣고, 몇 마리는 수면 위에서 가볍게 유영했다.
길은 곧 해안가 송림과 넓은 논 사이로 이어졌다. 바닷가와 가까운 지형답게 길가에는 솔잎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람은 모래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왔다. 길가 논은 겨울잠에 든 듯 고요했다. 그런 들판을 지나자, 멀리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성의 동해안. 거대한 하얀 기둥들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위로 고요히 서 있었다. 풍력발전기는 마치 바람의 성소 같았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구조는 인간의 기술이 자연과 싸우기보다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길 위에서 푸른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귓가에는 풍력발전기 날개가 천천히 회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놀랍도록 조용했고, 어느새 마음 한구석의 잡념을 덮어주는 백색소음이 되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아 눈부신 에너지로 바꾸는 일. 그것이 이 해변의 발전기들이 매일 해내는 일이다. 우리 삶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스쳐 가는 감정들, 기억들, 말들.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쌓여 언젠가 삶의 에너지로 바뀌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돌아서는 길. 어느새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였다. 발전기들은 노을 속에서도 묵묵히 회전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따뜻함을 느꼈다.
이윽고 길은 북천철교를 지나 고성 평화누리길로 이어졌다. 여전히 겨울이지만, 여전히 자연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갈대밭이 바람에 흔들리고, 바다 위 철새들은 자유로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그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걷는 발걸음이 천천히 리듬을 탄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오른편으론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왼편으론 산등성이가 조용히 나를 감싼다. 그 사이로 난 길 하나. 고요하게, 조심스럽게 이어져 있다. 마치 이 길이 말없이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 나왔다. 잿빛 겨울 하늘 속에서도 여전히 햇살은 존재한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도 따스한 위로였다. 어쩌면 평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향한 크고 거창한 외침이 아니라, 이런 조용한 기다림과 묵묵한 발걸음.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지속 속에서 싹트는 것.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도착한 곳은 거진항이었다. 고성군 거진읍에 있는 이 항구는 그 자체로 긴 여정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동해안의 대표 어항으로, 항구는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방파제 안쪽에는 고기잡이배들이 빼곡히 정박해 있었다. 방파제 끝에 걸터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풍력발전기 아래서 들은 바람의 노래, 갈대밭을 스치던 새의 날갯짓, 겨울 햇살의 조용한 위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항구의 평온함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서사처럼 이어졌다.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50대.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된 시기. 예전에는 '지금'이 곧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지금’이 결과여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다. 하루가 가면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여줘야 한다고, 늦지 않았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하지만 오늘, 이 겨울 바닷가의 바람은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가진항을 떠나 작은 오솔길을 지나고, 송림과 논 사이를 걷는다. 논은 잠들어 있고, 바다는 살아 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분다. 이 길에서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자연은 나를 달리게 하지 않는다. 대신 잠시 머물러, 지금 여기에서 숨을 쉬라고 말해준다.
길가엔 풍력발전소가 줄지어 서 있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품는 구조물들. 그것들은 조용히, 그러나 묵묵히 바람을 에너지로 바꾼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집착을 내려놓는 일은, 바람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이 바람처럼 잠시 스쳐 가는 것일 뿐. 내게 남는 건 결국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본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 떨어진다. 세상에 완전히 어두운 하늘이란 없다는 듯. 현재라는 시간도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지금, 바로 이 순간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보려면, 속도를 늦추고 욕심을 비워야 한다.
나는 오늘, 이 길 위에서 작은 결심을 한다.
집착하지 않기로.
무언가를 ‘이뤄야만’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다고 믿기로.
실패해도 좋고, 느려도 좋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걷다 보면 안다. 걷는다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임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