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4코스 ▏감각의 안단테
해파랑길 14코스를 걷기 위해 호미곶등대에 섰다. 강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고, 하늘은 잔잔한 흐림 속에 고요했다. 하지만 마음은 들떠 있었다. 오늘 걸을 길은 약 14.2km, 호미곶에서 시작해 대보항을 지나 다무포고래마을, 주상절리, 구룡포 해변을 지나 구룡포항까지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한반도의 가장 동쪽 끝자락, ‘호랑이 꼬리’라 불리는 이 땅끝 마을에서의 걸음은, 마치 우리 국토를 따라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밟아가는 느낌이었다.
호미곶은 새해 해돋이로 유명한 곳이다. 매년 1월 1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한다. 지금은 그 인파가 사라진 한겨울의 평일 아침. 텅 빈 광장에서 나는 바다 위에 솟아오른 ‘상생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친 물살 속에서도 우뚝 솟아 있는 오른손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육지에는 그 오른손을 바라보는 왼손이 묵묵히 서 있었다. 두 손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 조형물은 1999년 말, 새로운 천 년을 맞아 인류의 화합과 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다의 손은 생동감이 넘쳤고, 육지의 손은 포용과 안정감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딛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염원을 담은 이 두 손은, 나에게도 새로운 다짐을 품게 했다.
호미곶을 떠나 대보항을 지나 해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이 코스는 대부분이 드넓은 바다와 마주하며 걸을 수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 먼바다를 부유하는 어선들, 그리고 그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다가왔다.
걷다 보니 다무포 하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하얀 벽면 위로 그려진 파란 고래들이 눈길을 끈다. ‘고래가 머무는 마을’, 다무포. 이 마을 사람들이 고래처럼 큰 삶을 꿈꾸며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듯했다.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바닷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한편에는 해녀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찬 바닷물 속에서 맨몸으로 고기와 해산물을 캐는 해녀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동쪽 땅끝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평범한 어촌마을 같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이곳이 가진 특별함이 느껴졌다. 지도에서 보면, 석병리는 정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 끝은 고요하고, 낮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바다 마을이었다. 파도는 쉼 없이 바위를 두드리고 있었고, 갈매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겨울 바닷가는 한적했다. 조용한 항구, 가끔 들리는 어부들의 목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 그리고 머리를 맑게 만드는 짠 내음과 시원한 바람. 마음속 번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바다에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걷다 보면, 드디어 구룡포 주상절리에 도착한다. 이곳은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무엇보다 눈앞에서 보는 순간 그 신비로움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화산이 만든 육각형 돌기둥들이 바다를 향해 질서 정연하게 뻗어 있고, 바람과 파도에 깎인 주상절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검은색 바위와 파란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만들어낸 대비는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파도가 바위를 때릴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솟구치며 그 위를 덮었다. 물에 젖은 주상절리 표면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반짝임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낸 보석 같았다. 나는 바위 옆 벤치에 앉아 주상절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웅장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물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걷기의 끝자락, 드디어 구룡포항에 도착했다. 항구는 고요하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일본식 가옥들이 늘어선 거리, 낯선 글씨체의 간판, 작은 신사 터, 그리고 그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곳은 ‘일본인 거리’라 불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구룡포는 일본 어민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들은 각 건물의 용도와 당시의 모습을 설명해 준다. 오래된 여관, 어업 조합 사무실, 일본식 상점들. 거리를 걸으며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기나긴 여정의 마무리는 구룡포항 인근의 작은 식당에서였다. 오래 걷고 난 뒤 출출했던 배를 채우기 위해 ‘꽃게라면’을 시켰다. 큼직한 꽃게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라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주황빛 껍질의 꽃게는 라면 면발 위에 위풍당당하게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송송 썬 파와 아삭한 콩나물이 가득했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바다의 깊고 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일반 라면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었다. 얼큰한 국물, 탱탱한 면발, 그리고 꽃게 특유의 감칠맛이 어우러져 절로 감탄이 나왔다. 바다를 하루 종일 걸으며 몸이 추워졌던 터라, 이 따끈한 라면 한 그릇은 그 어떤 만찬보다 감동적이었다.
감각의 안단테, 작은 기쁨을 걷다
인생의 후반부는 어쩌면 오르막을 지나 평탄한 길로 접어드는 시점일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치열했던 속도전이 끝나고, 이제는 느리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삶을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다. 요즘 그런 리듬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스쳐 지나가던 계절의 색감이 눈에 들어오고, 예전엔 무심히 흘려보냈던 바람의 결이 피부를 간질인다.
꽃게가 들어간 라면을 먹으며 첫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뜻밖의 탄성이 터졌다. “아, 이런 맛이었지.” 짭조름하면서도 단맛이 도는 국물, 살짝 거친 껍질의 감촉, 김이 피어오르며 퍼지는 바다 내음까지 모든 것이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느끼는 법을 잊고 살았다. 식사는 허기를 채우는 일이었고, 길가의 꽃은 배경일뿐이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조차 휴대전화 화면의 매끄러움이 전부였다. 그런데 요즘, 아침마다 창문을 열고 들이마시는 공기에서 온도를 느끼고, 커피 한 잔의 향과 따뜻함을 천천히 음미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런 감각의 회복은 삶을 다시 사랑하는 방식이다. 더 이상 큰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연습이다.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은 어쩌면 이미 더 넓은 세계를 품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