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마음에 고요를 담는 법

해파랑길 3코스 ▏한발 물러서기

by 헨리황

대변항 → 기장군청→ 일광해변 → 동백항 → 임랑해변 (해파랑길 3코스, 16.7km)


부산 기장군 대변항의 멸치광장에 선다. 바다 냄새와 함께 아침 햇살이 항구를 감싼다. 소박한 포구의 풍경 속에 어민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이곳에서 해파랑길 3코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길은 곧장 봉대산을 향해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이름이 생소하지만, 산길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흙길과 숲의 향기, 새소리가 가득한 봉대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도시의 소음을 서서히 밀어낸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내내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위로받는다. 숨이 차오르지만,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뒤돌아보면 기장의 바다가 아득히 펼쳐지고, 파란 수평선 너머로 오늘의 여정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봉대산을 넘어서 기장군 내로 들어선다. 차도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도심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기장군청 앞을 지나며, 평범한 일상이 주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길은 사람 사는 냄새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흔적이다. 자성가 비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가사 문학, 자성가는 이 지역의 산천 경관을 읊은 기행제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수백 년 전 한 시인의 애향심과 사유가 새겨진 문화의 흔적이다. 한참을 머물며 그 시절의 바람과 풍경을 상상해 본다.


기장체육관을 지나 바다 쪽으로 방향을 튼다. 도심을 빠져나오자 다시 시야가 탁 트인다. 드디어 일광해수욕장에 다다른다. 기장 팔경 중 제3경으로 꼽히는 이 해변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길게 펼쳐진 백사장 가운데에는 삼성대라는 바위가 있다. 고려 말 정몽주, 이색, 이숭인이 이곳에서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또한 소설 '갯마을'의 배경이자 영화 '우리 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공간에서 나는 마치 시대를 건너는 기분이 든다.


일광해수욕장을 뒤로하고 걷다 보면 동백항에 이른다. 소박한 포구에 한국수산자원공단의 현대적인 건물이 대비되어 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곳을 지나며, 해안도로 옆 카페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바다를 향해 유리창을 낸 카페에서 사람들이 커피 한 잔에 오후를 누린다. 나도 잠시 멈춰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를 만끽한다.


다시 길을 재촉하면 신평리에 이른다. 이곳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먼 과거, 후기 백악기 시대의 흔적이다. 당시 이곳은 호수가 있었고, 습한 흙 위로 공룡이 걸으며 남긴 발자국이 오랜 시간 풍화와 퇴적을 거쳐 화석으로 남은 것이다.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 앞에 선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눈앞의 풍경은 평범하지만, 땅속에 숨겨진 시간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임랑교를 건너면 청암 박태준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포스코 창립자이자 한국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고(故) 박태준의 삶을 기리는 공간이다. 그의 생가 옆에 지어진 이 기념관은 한 세대의 꿈과 헌신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이다.


이윽고 임랑해변에 도착한다. 조용히 부서지는 파도 소리, 흩날리는 갈매기 울음 속에 하루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임랑해변에는 주말 오후마다 라이브 공연이 열리는 카페가 있다. 언젠가는 토요일 오후 세 시, 정훈희의 ‘꽃밭에서’가 흐르는 카페에 분위기에 빠지고 싶다.


마음에 고요를 담는 법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생생한 언어다. 기쁨은 삶에 색을 입히고, 슬픔은 우리를 더 깊게 만든다. 우리는 때로 그 무게에 휘청이곤 한다. 그렇기에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그 감정의 한 걸음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는 삶의 지혜가 된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감정의 폭풍을 만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히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에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감정이 곧 ‘나’라고 착각한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내가 곧 분노가 되고, 슬픔에 젖으면 세상이 모두 회색빛으로 보인다.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는 자주 되묻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감정은 어떤 상처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기대가 무너졌는지, 어떤 욕망이 충족되지 못했는지. 그렇게 감정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더 나은 배우가 되는 방법이다.


한때 감정에 휩싸여 중요한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고요히 말해야 할 순간에 목소리를 높였고, 기다려야 할 순간에 조바심으로 선택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후회를 되새기며 느꼈다. 감정은 순간의 진실일 수는 있지만, 늘 제일 나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감정에서 한발 물러선다는 건 내면을 객관적으로 마주하는 성숙한 시도다. 한 걸음 뒤에서 나를 바라보면, 나는 왜 화났는지, 왜 슬펐는지, 그 감정이 진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보인다. 그제야 우리는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나 자신을 더 지혜롭게 이끌 수 있다.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각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안에서 진짜 주인공은 감정에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이끌 줄 아는 사람이다. 나 자신을 단단하게 붙들고, 때론 웃으며, 때론 차분히 감정을 품는 사람. 그렇게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더 지혜로워진다.

3Course.jpg 일광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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