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7코스 ▏걷기 멍
해파랑길 47코스를 따라 삼포해변에서 가진항까지, 잔잔한 겨울의 결이 묻어난 길을 걸으며, 나는 고요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떠오르는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에 있는 삼포해변은 넓고 조용했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북적이지만, 겨울의 삼포는 그야말로 ‘고요한 쉼표’와 같았다. 바람은 제법 불었지만, 햇살은 포근했고 바다는 한없이 잔잔했다. 모래 위를 걷는 발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주변이 정적에 가까웠다.
삼포에서 시작해 오호교를 건너면 송지호해수욕장이 나온다. 철제 난간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문득 바다 냄새가 깊게 스며든다. 동해안 특유의 짙고 맑은 냄새는 어느 순간 마음을 정화해 주는 듯했다. 송지호해수욕장은 비교적 소박한 풍경을 간직한 해변이다. 인공적인 장식보다 자연 그대로의 해안선과 모래, 그리고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겨울 바다 앞에 조용히 서서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도는 힘차지 않았고, 바다는 부드럽게 숨을 쉬고 있었다. 마치 겨울이 되면 동해도 잠시 휴식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송지호해수욕장에서 송지호 호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호인 ‘송지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이면 이곳은 철새들의 천국이 된다. 고니, 흰죽지오리, 청둥오리 등 수많은 철새가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겨울을 난다.
송지호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송지호 철새관망타워에 들렀다. 4층 규모의 이 전망대에 오르면, 호수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철새들의 우아한 비행을 감상할 수 있다. 고니 한 마리가 유유히 호수 중앙을 지날 때, 나는 그 움직임이 너무 고요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말없이 바라봤다. 겨울이야말로 자연이 가장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갈궤도’라는 조형물이 나온다. 이 길은 과거 철도가 지나던 자리였고, 현재는 해파랑길의 일부로 변신했다. 유라시아 철도망과 연결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걷는다는 것은 시간과 기억을 밟아가는 여정이라는 걸 이곳에서 새삼 깨달았다.
송지호를 떠나 다시 해파랑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요한 숲길을 지나 왕곡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처음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담길과 흙길, 낮게 깔린 초가지붕, 그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풍경이 동화처럼 펼쳐졌다.
왕곡마을은 조선 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성촌이다. 고려 말 강릉 함 씨가 이주해 형성된 마을로, 이후 강릉 최 씨와 용궁 김 씨가 정착하면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마을 안을 거닐다 보면, 낡은 기와지붕과 정갈하게 쌓아 올린 장독대, 담벼락에 기대선 장작더미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느 한 고택의 마루에 잠시 앉았다. 나무로 된 마루판은 오랜 세월을 지낸 흔적이 역력했고, 그 위로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르신들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 모든 소리가 평화로웠다. 왕곡마을은 실제 주민들이 살아가는 ‘살아있는 마을’이다.
마침내 해파랑길 47코스의 종점인 가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활기가 있었다. 어민들은 그물 손질에 분주했고, 시장에는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이 진열돼 있었다. 삶의 리듬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항구 근처의 방파제에 앉아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길 위에서 마주한 바다, 철새, 전통,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 그 모든 것이 이 짧은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겨울의 고성은 소란스럽지 않다. 조용히 다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파랑길 47코스를 따라 걷는 동안 나는 한 걸음마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참모습을 느꼈다. 이 길에서 사람과 문화, 시간이 녹아든 공간을 걸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고성은 느리게, 하지만 단단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해파랑길을 걸으며 그냥 즐긴다
나이 오십이 넘고부터는,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보다 그냥 살아내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더 멀리 가고 싶다는 마음도,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도 예전만 못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늘 하루 무탈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로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버거운 날이 있다.
좀처럼 의욕이 솟지 않는 날. 시계는 움직이지만, 나는 멈춘 것 같은 날. 머릿속은 멍하고 마음은 무거운 날. 그런 날, 나는 굳이 억지로 뭔가 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배낭을 메고 바다를 향해 나선다. 해파랑길, 이 길은 내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나만의 피난처다.
강원도의 어느 바닷가. 해파랑길 47코스의 모래를 밟으며 걷기 시작한다. 어깨 위에 얹힌 피로가 파도 소리에 조금씩 풀린다. 파란 바다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다. 저 멀리 수평선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반긴다. 꾸며낸 위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감으로.
사실 걷는다고 해서 무기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걸을 때는 무기력을 잊을 수 있다. '내가 뭔가 하고 있구나'라는 감각. 그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발걸음 하나, 바람 한 줄기,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어느새 나를 붙잡는다. 의미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 길 위에서는 그냥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 직함도, 책임도, 성과도 내려놓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몸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 다리가 뻐근하고, 금방 지치기도 한다. 그런데도 걷는다. 이유 없이 걷고, 아무 기대 없이 바라보고, 아무 의미 없이 숨을 쉰다.
가끔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본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이 바람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듯하다. 의욕이 없으면 어떤가.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바다를 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그걸로 족하다.
좀처럼 의욕이 솟지 않은 날엔, 굳이 애쓰지 않는다. 해파랑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멈춰도 좋고, 앉아도 좋다. 중요한 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이 나이에야 비로소 배우는 느긋함. 해파랑길은 그런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