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1코스 | 쉼의 기술
해파랑길 41코스를 걷기 위해 강릉 주문진해변에 도착했다. 강릉시에 있는 주문진해변은 아름다운 해변과 맑고 푸른 동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넓은 백사장과 깨끗한 해수로 유명하다. 코스는 주문진해변에서 출발하여 향호, 지경해수욕장, 남애항, 휴휴암을 거쳐 죽도정과 죽도해수욕장까지 약 12.4km에 이르는 구간이다.
걷기의 시작은 강릉의 자랑, 주문진해변에서 출발했다. 이곳은 맑고 깨끗한 해수와 드넓은 백사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BTS의 앨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방탄소년단이 촬영한 그 버스정류장 앞에는 지금도 팬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팬 중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보았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해변가를 걷는 동안 젊은 세대들의 웃음소리와 사진을 찍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닷물, 그 위로 흩뿌려지는 소금기 어린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설렘.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이 풍경 속에서, 나는 한동안 시간을 잊은 채 바다 앞에 머물렀다.
주문진해변을 지나 조금 걸어가자, 향호가 나타났다. ‘호수’라고 부르기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이 공간은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기묘한 경계였다. 갈대밭 너머 철새들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고, 호수 가장자리엔 조류관찰대를 비롯해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이곳이 생태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를 새삼 느꼈다. 숭어와 농어, 농게 등 다양한 생물들이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나서부터는, 물 위에 살짝 머리를 내민 물새 하나에도 시선을 오래 머물게 됐다.
"산 좋고 물 맑은 양양이라네!"의 표지석을 지나서 지경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다른 해변과는 달리 한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다색은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었고, 바람에 살랑이는 파도 소리 외엔 들리는 게 거의 없었다.
화삼1교를 건너면서 시야가 확 트였다. 다음 목적지는 강원도 3대 미항 중 하나로 꼽히는 남애항이었다. 이름 그대로 남쪽 바람이 불어오는 항구라는 의미가 있는 이곳은, 조용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바다 마을의 정취를 오롯이 품고 있었다. 붉은 등대와 하얀 등대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정겹게 느껴졌고,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도 여럿 보였다.
방파제 근처에서는 어부들이 명태를 말리고 있었다. 조용한 손놀림 속에 삶의 노고와 숙련된 기술이 묻어났다.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함께 말린 생선의 고소한 향이 어우러져, 항구 전체에 생생한 어촌의 기운이 감돌았다. 정갈하게 쌓아 올린 그물과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부잔교 위로 햇살이 부서지며, 나는 이곳의 일상 속 풍경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남애항에서 조금 더 걸으면 해안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찰, 휴휴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반적인 산속의 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바다 한가운데 솟아오른 기암괴석들 사이에 불상과 조형물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쉼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휴휴암’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은 누구나 와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이었다. 커다란 지혜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비는 여행객들,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노부부의 모습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요함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여정의 마지막인 죽도정에 도착했다. 죽도정은 양양 8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경승지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다. 정자에 오르기까지 짧지만, 인상 깊은 계단길이 이어진다. 길목마다 이름이 붙은 바위들이 있어 흥미를 더했다. 부채바위, 신선바위, 쌍둥이바위 등 저마다 전설과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들이 여정의 마지막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죽도정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드넓은 동해와 푸른 산세가 어우러진 파노라마 속에서, 하루 종일 걸은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죽도정에서 내려오면 바로 죽도해수욕장이 이어진다. 이곳은 서핑의 메카로 불릴 만큼 젊은 서핑 애호가들이 가득했다. 백사장엔 서핑보드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 바다 위에 떠 있는 수십 개의 서프보드, 파도를 기다리며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들이 인상 깊었다.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인 에너지가 이 해변을 감싸고 있었다.
쉼의 기술, 그리고 다시 떠나는 여정
50대.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왔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 성취와 실패가 교차했던 순간들, 그리고 언젠가는 쉬겠다고 다짐했던 그날들이 이제 현실이 되어 있다. 이제는 쉼이 필요하다. 쉰다는 것은 다시 걷기 위해 숨을 고르는 과정이며,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이른 아침,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그 위를 미끄러지는 바람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바람을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바람도 쉬어야 한다. 해안가 바위틈 사이에서 잠시 멈추고 다시 떠난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그 흐름 속에는 반드시 멈춤의 순간이 필요하다. 쉰다는 것은 곧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50대가 되어 처음으로 "쉬는 기술"을 배운다. 젊을 때는 단순히 긴장을 풀면 되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쉼에도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먼저 몸을 쉬게 하기이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순간, 몸이 진정으로 쉬기 시작한다. 걷기, 명상, 그리고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에너지를 회복하는 좋은 방법이다. 두 번째는 마음을 쉬게 하기이다. 과거의 실수, 미래에 대한 불안, 나를 가두는 생각들을 내려놓는다. 쉼이란 삶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맞닿아 있다.
쉼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명확해지고, 삶의 방향도 또렷해진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고,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 고민한다. 50대의 미래는 이제는 무엇을 하며 즐겁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들, 경험하고 싶은 것들.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설계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쉼은 우리가 다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 과정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쉬고, 충분히 돌아본 후,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더 자유롭게, 더 현명하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