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예술가를 “충족되지 않는 무의식적 욕망을 승화의 과정을 통해 미적으로 표출하는 데 성공한 신경증 환자”로 개념화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늘 날, 특히 20세기 대중매체에서 다룬 예술가의 이미지는 이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나 싶다. 남다른 욕망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폐인과 다를바 없는 인상의 인물. 그 이미지 덕에 많은 백수낭인들은 스스로의 떨어지는 사회성이나 생활력에 관해 좋은 핑계와 정당화 거리를 찾게 되었을 테다. 그러니까, 내 문제의 핑계와 정당화의 근거가 프로이트에게 있다는 이야기이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려는 데에는 어떤 욕망이 작용할까. 얼마 전에 읽은 『적정 코미디 기술』이란 책에서도 다룬 “깁”이란 은어를 활용한다면, 다른 이에게 웃음을 줌으로써 스스로 기쁨을 느끼려는 욕망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관객의 웃음에서 오는 인정욕구. 그 “깁”을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하자면 자학개그를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여기에는 마조히스트적인 욕망도 혼재한다 할 수 있겠다. 이쯤되니 이해가 된다. 왜 그 많은 스탠드업 코미디 쇼가 19세 등급을 받는지. 성적이거나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오직 말로만 채워진 이 쇼 자체가 남다른 욕구를 발산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쓰고보니 걱정이 된다. 스탠드업 코미디 한 번 해보겠다고 도전기를 쓰는 나란 사람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될지….
얼마 전에는 나의 유아기적 욕망을 채우는 일이 있었다. 중력가속도를 활용한 속도감의 욕망. 미끄럼틀을 탄 것이다.
그 미끄럼틀을 탄 곳은 내가 사는 지역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은 사회적협동단체에서 운영하는 공간으로 총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 아담한 규모의 도서관이다. 2층 한쪽 구석 벽에는 복층으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얼마 전 그 복층 한쪽 공간에 2층 마루 바닥까지 미끄럼틀로 연결한 것이다.
그 미끄럼틀 앞에는 나의 유아기적 욕망을 자극하는 하나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지구라는 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중력조차 신기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나의 오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그 문구.
“만 4세 이상만 타세요.”
너무 어린 아이가 타다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적힌 안내 문구였다. 만 4세 이상이면, 나도 타도 되나..? 어느 새 서른 후반에 접어든 나도? 그러나 그 미끄럼틀을 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 미끄럼틀의 바닥 도착 지점이 사서 데스크 바로 옆이었던 탓이었다. 서른 후반의 수염 투성이 아저씨가 타기에는 민망할 수밖에 없는 탑승 환경. 그런 환경에도 언젠가 한 번은 이 미끄럼틀을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이 도서관의 평소 이용객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직원 수도 많지 않아 순환하며 근무하다 보면 2층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순간이 한 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는 꽤 어렵지 않게 찾아왔다. 2층에 다른 이용객이 아무도 없었던 때가 말이다. 나는 조심스레 미끄럼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도착 지점을 향해 조심스레 시선을 옮겼다. 데스크에 사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기둥 사이로 조심스레 시선을 옮기는 순간, 나는 데스크에 앉아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중년의 사서와 눈이 마주쳤다. 혼자 조심스레 복층 공간에서 걸음을 옮기며 눈치를 봤으니 이상하게 보였겠지.
그러다 얼마 전에는 확실하게 2층 서가에 아무도 없는 때가 왔다. 다른 이용객도, 데스크에 사서도, 확실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걸음을 옮겨 미끄럼틀 위로 조심스레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순식간에 2층 바닥으로 미끄럼을 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원래 미끄럼틀이 이렇게 빨랐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어릴 때 미끄럼틀은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었는데. 그냥 타기에는 지루해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엎드려서 타기도 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타기도 하던 미끄럼틀이었는데….
미끄럼틀을 얼마 만에 탔는지 대략 햇수를 세어보니 30여 년만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건너 어릴 적 했던 놀이를 했는데, 여전히 재미있다니. 역시 클래식은 영원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