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시간을 내어 내 브런치를 둘러봐주신 세상 착한 분들이시라면 아실 거다. 내가 영화 작업을 하(려)는 사람이란 사실을. 말하자면 영화감독인 셈이다. 흔히 입봉이라고 하는, 장편영화 연출은 아직 못했지만 어쨌든 단편 작업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그러면서 장편 준비도 하고 있으니까.
영화를 처음 시작한 이후로 한국영화가 위기라는 얘기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듣는다. 그 원인으로 한동안은 팬데믹과 OTT서비스가 주요하게 거론되었고, 최근에는 생성형AI가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추가된 듯하다. 이런 가운데 장항준 감독님이 연출한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 관객 동원 소식은 고무적이다. 이제 막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많은 관객이 보고 이야기 나눌 작품이 나왔다는 말은 그 자체로 극장가에 활기가 돌았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올 한 해 의미 있는 영화라 해도 좋지 않을까. 아직 3월 밖에 안 되기는 했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나 또한 영화인으로서 이 작품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1,300만 명의 관객이 집계된 영화이니 웬만한 분들은 다 이 영화를 보셨을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단종과 그의 유배지에서 그를 보필하던 엄흥도의 이야기라는 소재를 아는 이상 대략의 줄거리는 아실 것이다. 이 영화에는 단종을 복위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모의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돌그룹 2AM 출신의 배우 정진운 님이 연기한 동지중추원사 조유례가 명을 받드는 장면이다. 배우 님의 출신을 암시하듯, 새벽의 어슴푸레한 어둠 아래에서 단종이 화살을 쏘아 전달한 메시지를 확인하는 장면. 그 대사는 이렇다.
“동지중추원사 조유례! 명을 받들겠나이다.”
잠깐 지나가는 이 대사를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까닭은 이 장면을 촬영하는 그 현장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현장에서 이 대사를 무전기로 감독님이 배우에게 연기 디렉팅을 하는 소리를 포함해 최소 예닐곱 번은 들었기 때문이다. 저 대사 속 이름인 “조유례”가 발음 때문인지 나에게는 계속 스트리트 파이터 속 기술 이름인 “허두켄”처럼 들렸기 때문이다.(동지중추원사 워류겐)
이 장면 촬영 당시 나는 화면에는 잡히지도 않는 저 먼 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라이터를 켜라》 속 민방위 훈련소처럼 조선시대 군사 복장을 한 보조출연자들과 흙바닥에 이리저리 널부러진 자세로 “동지중추원사 워류겐”을 들으면서. 그 긴 대기 시간 이후에는 단종 복위를 위해 행군하는 군사들 사이에서 깃발을 들고 들판을 달려 기마부대와 합류하는 보병으로 참여했다. 대충 번호로 치면 군사 178번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천만 영화에 참여한 배우가 되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장항준 감독님께 연기 디렉션까지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디렉션.
장항준 감독님 (무전기로 내 근처 연출부 스태프에게) 거기 첫 줄 끝에 보조출연자 분,
조금 오른쪽으로 가서 뛰어주실 수 있나?
스태프 (나에게) 형*. 이쪽으로 와서 뛰실게요.
나 여기요? 여기 길이 없는데요?
장항준 감독님 (역시, 무전기로 내 근처 스태프에게) 거기서 뛰어야
화면에 대열이 예쁘게 나올 거 같은데?
그렇게 찍은 장면은 영화에 대략 3초 정도 나온다. 3초 뿐이지만 나는 그 장면에 책임감을 갖고 임했다. 두 번 정도 뛰었는데도 대열이 맞지 않아 결국에는 뒷사람과 자리를 바꿔 두번째 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참여했다고 하기도 힘든 분량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1,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기분이 좋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관객 분들이 한 사람당 10원씩만 나에게 줘도 1억 3천이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15,000원의 영화관 입장권 수익 분배 구조를 따지면 배당되는 금액이 또 달라지겠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보조출연자에게는 러닝 개런티라는 게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쉽다. 당연하다. 보조출연자의 인건비는 최저임금 수준으로 책정이 되니까. 그렇더라도 꽤 괜찮은 일이긴 하다. 밤샘 새벽 촬영에도 야간 수당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밥까지 챙겨 주니까. 촬영지에서 집합지까지 차량 이동도 직접 해주고.
그렇게 2회차의 새벽 촬영에 참여해 보조출연 인건비로 33만원을 받았다. 33만원. 3초 정도 지나가는 분량을 생각하면 초당 11만원을 받은 셈이다. 어쩌면 보조출연자가 아니라 카메오로 섭외된 게 아니었을까. 카메오는 보통 거마비 수준의 진행비만 받는다고 하니까.
33만원이면 거마비로도 나쁘지 않다. 촬영지가 있던 강원도 고성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 야간 할증만 없다면 택시로 왕복을 시도할 수 있는 금액이니까.
그렇게 3초 정도 출연해 받은 그 돈은, 내 통장에서도 3초 만에 사라졌다. 월세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나,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N회차 관람을 하실 분이 있으시다면, 부디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시길. 그 안에 나의 월세 33만원이 자막과 함께 흐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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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현장 스태프들은 보조출연자들을 모두 형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