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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Jul 07. 2020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생명

임이랑의 <아무튼, 식물>


 속으로는 영이 스테이크 구울 때 따서 써주길 바라며 선물이라고 음흉하게 들이밀었던 로즈마리가 거멓게 말라 갔다. 처음엔 윗부분만 마르더니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듯 모든 잎의 생명을 잠식해갔다.


 “어, 얘 죽었다.”


 영이 로즈마리에 사형 선고를 내렸던 날, 집에 아무도 없는 낮에 조용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창한 계획에 비하면 푼돈으로 얻어온 친구라 그런지 아깝지는 않았다. 아직 소고기를 사기 전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난달에 산세베리아 문샤인 새싹을 분갈이해서 화분 하나를 더 늘렸으니까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육이도 죽이는 사람이라고 놀림 받는 내가 화분을 무려 다섯 개나 관리하고 있다. 내가 산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이사 온 후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로즈마리는 내가 샀었는데, 이제는 없으니 논외. 원하든 원치 않았든 고마운 마음이 담긴 생명이고 또 우리 집 플랜테리어를 담당해주고 있으니 그래도 이름과 간단한 관리법 정도는 알아야겠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고서 그냥 내 맘대로 키운다. 다행히 우리 집 식물들은 나와 달리 타인의 관심 없이도 꽤 오래 버틸 수 있는 모양인지 내가 무심히 지나쳐도 스스로 싹을 틔우고 새잎을 펼치며 자라주고 있다. 우리의 관계를 굳이 표현하자면 각자 알아서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면 약간 미안하기도 하고 달라진 모습이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매일 아침 물을 주고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다.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113쪽)라는 저자의 말에 나도 공감하고 싶지만 양심상 그럴 수 없는 기분이 약간 시큼씁쓸하다.




 불안했던 과거는 지나왔지만 이따금 실체 없는 어둠에 눌릴 때면 저자는 식물의 세계로 도망쳐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한다. 이제는 식물과 함께 사는 일의 즐거움을 알아버려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내일의 싹과 새순과 꽃봉오리를 기대하며 기다린다고, 내가 죽으면 곧 같이 죽게 될 여린 식물들에 물을 줘야 하니 내일도 모레도 살자고 말한다. 내일은 없는 듯 어둠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이 아침을 기다리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매일의 필요와 계절에 따른 고충을 살뜰히 챙기는 성실한 열심과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걱정하며 같이 맞아준다는 다정함은 어디서 나올까. 세 자릿수가 넘는 식물의 이름과 성격을 다 기억하는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끈질겨서 아름다운 식물의 삶을 돌보다 보면 그 삶과 연결된 내 삶의 소중함도 자라나 보다.


그새 다시 비집고 올라온 산세베리아 새순. 귀엽고 고마운데 언제 또 옮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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