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쌍수 실천하기
‘착하다’라는 말은 과연 칭찬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왠지 예전부터 ‘착하다’라는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집에서 곱씹어보곤 했던 것 같다.
이 ‘착하다’는 말. 사전적 정의로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물론 너무나 긍정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사용하는 착하다는 묘하게 다른 의미가 섞여있는 듯 하다. 보통 사람들이 상대에게 착하다는 표현을 할 때는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받았을 때에도 그저 좋은 것이 좋으려니 할 때,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않을 때 등이 있겠다. 이 외에도 착하다는 표현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겠지만 위의 언급된 경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착한 사람은 진짜 사전적의미의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본성이 맑고 여려서 싫은 소리를 잘 못하거나 모든 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베푸는 사람입장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보는 다른 관점에서는 포용적이지 않아야 할 때도 포용적이며 말을 해야 할 상황인데도 상대걱정을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한 번 착한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그 인식을 깨부시기가 어려워 자신이 그 틀안에 갇혀 나중에는 원하지 않음에도 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버릴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착한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착한 것을 악용하는 사람일 것이다. 왠지 부탁하면 다 들어줄 것 같고 거절을 못하니 은근히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 가장 스트레스받아하는 난제다. 보통 착하다는 인식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고 모든사람에게 비슷한 잣대를 적용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남겠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은 이용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일도 파다하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은밀하고도 묘한 불편한 사실은 ‘착하다’는 말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런 일들에 근거한 착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들은 착하다는 말에 둔하고 어리석다는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그런 사람은 안 만나면 그만이겠지만 학교생활을 하며, 직장생활을 하며 여러 사회생활을 하면서 피하기만 할 문제는 아니다. 자발적아싸(?)를 자처하는 것이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악해지겠다고 마음먹고 나쁜남자, 나쁜여자가 되는것도 본인에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며 되겠다고 마음먹어도 그 본성은 쉽게 바뀌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본인을 지키면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역사 공부를 하던 중 문득 지눌의 ‘정혜쌍수’의 의미를 깊게 들어다보게 되었다.
정혜쌍수란 선정의 상태인 ‘정’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인 ‘혜’를 함께 닦아나가는 수행법이라고 한다.한자로 풀어보면 定(정할정) 慧(슬기로울혜)인데 정에는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종교적으로는 산란한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룬 선정의 상태라고 하는데 이걸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바르고 올곧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혜는 한자에서처럼의 슬기로움을 뜻하는데 슬기롭고 총명하며 사리에 밝다는 의미가 있다. 종합해보면 통찰력이 있고 그로 인해 사물의 본질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정혜쌍수는 이 두가지 요소를 치우침없이 훈련하고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종합해보면 현명함을 뜻한다.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고 너그럽지만 동시에 상황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능력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어느 것도 치우침이 없어야한다는 것일 것이다. 무언가가 치우치면 융통성이 부족하게 되거나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도 마냥 착하기만 하지만 않으면 된다. 너그럽고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되 확실한 자신의 기준과 판단력이 있어야하고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부당하다면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명확한 기준을 가져야하고 옳고 그름을 더욱 따져야한다. 사사로운 정보다는 확실한 선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기에 착한 사람들은 어쩌면 힘들어할테지만 오히려 노력만 한다면 더 깔끔한 세상이 올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과 평가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조금 더 중요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꽁꽁 무장하고 방어기제를 만들 필요도 없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말하고 현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보고 융통성과 사회성이 없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렇기에 아직 예전의 사상을 가지고 확실하고 명확한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고 ‘착하다’의 의미를 다시 설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관점은 세상에 냉정한 사람이 많아졌다고 개인주의가 되어간다고 비관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이 된다면 오히려 너그럽고 포용적인 건강한 의미의 착한 사람이 많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빛바랜 착한 사람말고 사전적의미의 착한 사람으로 말이다. 착하다는 말이 결국 현명하다라는 뜻이 되기까지 정혜쌍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