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인생
여덟 살의 우린 샤프를 쓰면 혼났다. 글씨를 예쁘게 쓰려면 연필로 써야한다고 했다. 샤프를 쓰지 못해 억울한 마음의 타협점은 예쁜 연필이었다. 꼭대기에 보석 모양이나 인형이나 캐릭터가 붙어있는 연필을 쓰면 종일 뿌듯했다.
쉬는 시간이었다. 친구가 새로 산 연필을 자랑했다. 내 것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는 딱 두개였다. 취급하는 물건도 거기서 거기였다. 똑같은 게 있다고 하면 따라하는 것 같고, 괜히 ‘나도 써볼래!’ 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친구들에게 물건을 얼마든지 빌려줄 용의가 있었지만… 그 날만큼은 싫었다. 연필은 한 번 빌려주면 다시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빌려준 물건이 온전히 돌아오는 일도 잘 없었다. 산 지 얼마 안 된 아끼는 연필을 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 뒤 조용히 글씨를 쓰던 나를 유심히 보다가 던 그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그 연필, 너 니꺼 맞아?”
“내껀데.”
“증거 있어?”
여덟 살 인생 처음으로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에게 증거를 대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 내껀데…" 밖에 없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말했을 뿐인데.
그가 열심히 자랑하던 모습을 봤던 다른 친구들도 말을 얹기 시작했다.
“그래~ 아까 연필 자랑하는거 우리 다 봤잖아~”
“맞아, 맞아.”
증인도 증거도 없는 나의 주장은 힘을 잃고 말았다. 친구는 “선생님한테 너 일를거.” 라며 이미 나의 도둑질을 기정사실화했다. 연필 도둑이 되기 직전이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은하 선생님의 솔로몬의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이 재판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정정당당히 진행되었다.
“두 사람 모두 필통을 가지고 앞으로 나오도록.”
나와 친구는 결연한 표정으로 필통을 교탁 위에 턱 내려놓았다.
필통을 열어 선생님은 두 사람의 모든 필기구를 꺼내 펼쳐놓았다.
싱겁게도 판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 이 연필은 화영이 것이다. 가져가라.”
“네? 이건 제거란 말이예요.”
친구의 필통 속 연필들은 샤파 연필깎이로 깎은 일률적인 모양이었다.
나의 연필들은 손으로 직접 깎은 모양이었다. 내 연필은 꼭 아빠가 칼로 직접 깎아주었다.
아빠는 칼로 하는 건 다 잘했다. 사과 깎는 것도 엄마가 깎으면 껍질이 두툼하니 버리는게 반인데, 아빠가 깎으면 예술적으로 얇은 두께에 껍질은 한번도 끊기지 않고 쭉 이어져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빠가 깎은 연필은 아빠만의 스타일이 있다. 심 끝이 아주 예리하지만 떨어트려도 잘 부러지지 않았다. 영주 부석사 배흘림 기둥처럼 가운데 부분이 살짝 통통하게 생겼다. 심 위의 나무 부분이 절묘한 각도를 이룬다.
아빠의 칼솜씨와 선생님의 지혜가 나를 혐의로부터 해방시켰다.
친구들의 사과를 받았다. 평화로운 결말이었지만 연필은 결국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야, 나도 한번 써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