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비껴 난 사람의 속도

by 퐝클리

지구는 자전 중이라 시차가 존재한다. 어떤 곳은 밤인데, 어떤 곳은 아침 해가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다. 자연은 시차를 품고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시차는 해명하거나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 또래들과 조금씩 시차가 생겼다. 휴학을 길게 했다. 그 기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아왔다. 이력서를 보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오래 쉬었어요?”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던 건데, 휴학의 이유는 없었다. 직업도 늦게 찾았고(29살 10월, 가을바람보다 늦었다), 결혼도 친지, 친구들 중 가장 마지막이었다. 아이는 낳지 않았다.


그렇게 또래들이 자연스럽게 밟는 ‘기혼자 생애주기’에서 이탈했다. 비교군이 사라졌음을 느끼자 약간의 ‘그럴 수도 있지’란 허용이 생겼다. 그런데 그 허용이라는 게 마냥 속이 편한 종류는 아니었다.


남의 시선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평가가 전혀 필요 없다고 믿는 순진함도 없다. 우선순위를 잘 알고, 그저 깊이 신경 쓰지 않게 훈련을 해가는 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일(성과와 고용)의 세계에서는 결국 누군가의 시선이 판단 기준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시선조차 허용해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남편이 버니깐 넌 좀 쉬어도 되잖아


-자식이 없으면 크게 돈 들어갈 데 없잖아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가계부 항목 몇 줄로 요약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말투는 가볍지만, 남는 건 묵직한 돌 하나다. 마치 ‘네가 짊어진 짐은 가볍다 ‘란 결론을 이미 대신 내려버린 말처럼.


그 말에 대고 내가 아니라고, 왜 그게 단순한 산수로 계산될 수 없는 문제인지 설명할 수 있지만 너무 사적인 영역을 건드린다. 말을 줄이자니 결국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내가 서 있던 곳은 부지런히 뒤로 밀려났다


느리지만 그래도 ‘가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점점 재미없어졌다. 중력에서 벗어난 물체처럼 계속 위로만 떠오르는 기분. 산소가 희박해지는 대기권에서 부유하는 느낌. 그 속엔 미세 먼지 같은 불안과 우울이 가득하다. 현실감이 희미해져서일까? 나는 경박스럽게 업을 바꾸겠다고 결정했다. 이 선택 역시 또 다른 ‘시차’를 만들어낼 것이다. 결과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에 기록해두려 한다. 요즘 내가 이 정도의 무게로 살아간다는 사실만 간신히 깨닫는 중이다


보통 이렇게 잡생각이 무겁게 눌어 앉는 날엔 술로 머리를 잠재우곤 했다. 내 세계에선 오래 신뢰해 온 사생활용 의학 체계다. 효과는… 글쎄, 과학이 그렇듯 믿는 사람만 아는 거겠지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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