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주문
마음에도 시차가 있을까?
겉모습은 햇빛 아래 있는데, 마음은 여전한 그늘 속에서 느리게 따라가고 있다.
오늘도 난 사람을 만나 잘 살고 있는 척하고 왔다.
별문제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진짜 속내를 말하는 것보다 비교적, 아니 훨씬 쉽다.
삶에 이벤트가 없는 사람처럼, 남의 이야기엔 적당히 귀 기울이며 내 이야기는 너스레 떨며 웃으며 넘어가면, 넘어가지는 것 같다.
말과 마음의 0점이 잡히지 않는 날이지만 이런 날은 오히려 스스로가 흡족했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면 나 스스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좋았다.‘이인증’처럼 내 마음과 내 몸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친구들이 본인들의 이야기하면서 감정 주파수가 변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내가 그래본 적이 너무 오래라, 적어도 내 눈엔 건강해 보였다. 그들이 나와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는 모른다.
다만 이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나는 상당히 집중했다는 거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게 훨씬 더 나를 어렵게 하는 일이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척하는 동안 내가 내 거짓말에 내가 위로받고 있다고 믿었거든. 재밌는 일이다.
고백하자면 스스로의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다는 말을 좋아한다.
땅 아래로 박힌 건물이 층층이 곰팡내 나는 구조를 하고 있어도 지상 로비층 하나만 말짱하면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그 로비층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그것은 원하는 바를 반복해서 읊다 보면 이뤄진다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궁금한 것은,
말의 주문은 금세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간극 속에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심적 노동의 이름을 무엇으로 부를까이다.
정오의 햇살이 나무 위로 내려앉으면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 안에선 시원하고 밖은 선명하지만, 감정의 언어로 바꾸면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늘 속에서는 더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이미 충분히 어두워서 더 겹칠 여지가 없는 짙음.
바람이 멈춰 너울이 사라진 바다처럼 움직이지 않고 깊게 가라앉은 마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셀로판 덮개처럼 보이는 진공 같은 수면에 덮어진 감정.
나는 그것이 ‘‘회복’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저 내 곁에 잠시 머물다 어느 순간 다시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시간이 의미 있길 바란다.
봄의 꽃이 여름의 잎이 되고, 가을 단풍이 겨울 목전에 낙엽이 된다. 시간을 붙들지 못해 나가떨어져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면서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
한 가지에 난 것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며 잘 자란 과정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혹시 다시 돌아올까 봐 미리 겁내지 않아도 될 이름이었으면 한다.
불행복의 언어가 컴퓨터에 명령어 같이 정해진 결괏값을 내놓을까 두렵다. 하여 ‘회복’이라 부르는 것이 앞으로 무수한 삶의 회차로 반복될 테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척’ 같은 기만은 아닐 거라 믿는다.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