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오년사월이십팔일

by 문독수

기차를 타야되는 데 시간이 고장났다는 것이다. 시계가 아니라 시간이 고장난 것이니 나는 곧 기차에 올라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건 기차역 광장 한복판에 서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울렸다. 거기도 시간이 고장났구나. 여기는 괜찮아. 이 동네는 건전지가 넘쳐나니까. 건전지를 제때 갈아주지 않으면 놓친 시간만큼 기억을 잃는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돌았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네 누구시죠. JB, 나 이제 곧 기차 타. 귀찮다고요? 아니 기차를 타고 너 있는 곳으로 간다고.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모르겠네요. 제가 최근에 죽을 만큼 재밌는 드라마를 하나 보다가 시계 건전지 가는 것을 깜빡해버렸거든요. 아, 몇부작 드라마였나요. 저도 몰라요 아직 보고 있거든요. 무슨 내용이죠? 한 남자가 집에서 포르노를 초단위로 끊어보는 모습을 3대째 묘사하는 드라마에요. 이제 4대째 되는 녀석이 AR기계를 머리에 끼고 가상현실 속을 허우적대는 중이죠. 건전지를 가실려면 아직 한참 남으신 거 같네요. 아마도요. 저희는 어떤 사이였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죠. 나는 전화를 끊고 광장 속 인파를 뚫고 역밖으로 나갔다. 광장 한복판의 시계탑이 정각을 가리키자 멈췄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움직이고 기차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사방에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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