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쓰지 못하는 은혜가 연골이 다 나간 투데이에 연민을
그리고 정해진 주로를 박차고 나왔던 연재가 하늘을 보다 낙마한 콜리에 연민을 가졌던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각각의 관계는 사뭇 다르다.
가족 간의 부채 의식으로 소통이 끊어진 자매와 서로가 서로의 기쁨이 되는 한 호흡의 파트너
자매는 투데이와 콜리를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 했지만 사실 정말 구원을 받은 건 자매들 본인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대상들을 살피며 그들은 스스로를 타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멀어졌던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동병상련의 연민은 자매의 작고 외로운 세상을 구원할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
‘천 개의 파랑’은 볼거리가 많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하게 보고 말하는 풍경과 언어를 되짚어보는 콜리의 시선은 참 인상 깊다.
나의 감상과 언어는 내 진심에 얼마나 맞닿아있었는지.
나는 얼마나 성의 있게 나의 언어를 대했는지 반성의 계기였다.
또 각각의 인물들이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서술되는 점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그들을 관계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닌 개개의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인물, 소방관만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아빠, 남편 등 다른 대안도 많았을 텐데 작품에서 그를 소방관으로만 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작중에서 이미 사망한 인물이고 이것은 그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타인의 회상과 추억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그는 오로지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보경에게 소방관은 재난의 현장에서 그를 살려준 은인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를 살리려 애쓰다 화마에 휩싸여 산화된다.
나아가 그의 사망보험금은 보경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식당이 되어 그들을 먹여 살린다.
보경에게 그는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소방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책의 결말은 사실 아쉬웠다.
콜리와 투데이가 각자의 존재 이유를 극복하길 바랬지만 그러지 못한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로봇인 콜리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1인칭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서술방식은
자신의 최후를 본인 스스로 선택한 결말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 같다.
오래도록 기억될 거 같다.
#천 개의 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