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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마니 Jul 21. 2022

마흔 살의 자아 설명서

- 마흔 살은 1인 다역 -

나이가 들수록 해내야 하는 역할은 점점 늘어난다. 부모님의 사랑받는 어린아이에서 학교에서 인정받는 착실한 학생을 거쳐, 회사에 성과를 안겨줘야 하는 직장인으로 진화하면서 점점 역할의 가짓수는 늘어나고, 크기는 커져간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몇 배가 된다.

마흔 살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누릴 것 같지만,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기 위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우아한 백조처럼 물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두발을 휘젓고 있어야 한다. 결혼한 워킹맘을 가정한다면, 양가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 직장상사와 부하 등 하루에도 수십 명의 상대방에 따라 적절한 자아로 변신하며 1인 다역의 연극을 매일같이 해내고 있다. 마흔 살의 하루는 참으로 녹록지 않다.


마흔 살, 현재 나의 자아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 되는 것 같다.  

(1) 자식으로서의 나, (2) 아내로서의 나, (3) 팀장으로서의 나

현재 나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이 정도지, 자녀가 있다면 부모로서의 자아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할 거다.


먼저, 자식으로서의 나는 형편없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나는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딸이다.

어느 날은 엄마가 갑자기 아프다는 연락을 해서 급하게 남편이랑 친정에 내려갔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엄마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랑 사위 아침밥 해준다고. 순간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아프다는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밥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버럭 하고야 말았다. 내가 화를 내도 엄마는 조용히 아침밥을 차려 나에게 먹이고야 말았다. 엄마의 조건 없는 사랑 앞에서 나는 항상 패자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 못 할 거다. 엄마가 되지 않는 이상. 자식은 평생 부모님이 준 사랑의 반도 돌려주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 자식으로의 나는 항상 NG(No Good) 연발이다.


둘째, 아내로서의 나는 비교적 잘 해내고 있는 중이다. 결혼한 지 1년 뒤에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을 하는 바람에 현재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는데, 누구는 부러워한다지만, 나는 남편을 만나는 금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같이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을 꼽자면, '남편'이다. 음식취향, 개그코드, 삶에 대한 태도가 비슷하고, 모든 면에서 맞지 않는 것보다 맞는 것이 훨씬 많다. 자녀를 낳지 않게 된 것도 남편과의 둘만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마냥 좋아서 자연스럽게 합의가 되었다. 앞으로 이 사람과 40년, 길게는 60년까지도 살 텐데 그 시간들이 지겹게 느껴지기보다, 기대가 된다. 노후에 마음이 맞는 오래된 친구가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


셋째, 팀장으로서의 나는 매일매일이 걸음마 연습 중이다. 팀장 발령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직도 역할 습득이 부족한 나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연차가 쌓여 자연스럽게 리더가 됐지만, 난 누군가를 이끄는 재주가 없다는 것만 점점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 역할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은 꾹 참아보고 있다. 현재로서는 나의 가장 버거운 자아이고, 탈출하고 싶은 자아이다.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인데, 또 그만큼 스트레스를 한가득 안겨주는 괴로운 자리이다.


여러 가지 역할들을 모두 잘하려고 하다 보면, 전부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전부 잘 해내는 훌륭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다. 하지만 한정적인 시간에 모든 것을 잘 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시간에 내가 집중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그 시간만큼은 그 자아에게 100% 집중해야 한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일요일만 되면 출근 걱정에 예민함이 폭발해서 소중한 남편과의 주말을 쓸데없는 걱정으로 채운적이 있고, 회사에 정작 출근하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투루 보낸 시간이 많았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나 자신이다. 고쳐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자존감 부족에서 오는 약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제일 엄격한 평가자가 되어 나의 여러 역할들 중에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잘 해내고만 싶은 마음은 접어두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자기세뇌 인지도 모른다. 마흔 살의 성공적인 1인 다역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는 것, 잊지말자!



"마흔 살의 1인 다역 성공 TIP"

메인 캐릭터에 집중해

나머지는 조연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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