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해내야 하는 역할은 점점 늘어난다. 부모님의 사랑받는 어린아이에서 학교에서 인정받는 착실한 학생을 거쳐, 회사에 성과를 안겨줘야 하는 직장인으로 진화하면서 점점 역할의 가짓수는 늘어나고, 크기는 커져간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몇 배가 된다.
마흔 살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누릴 것 같지만,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기 위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우아한 백조처럼 물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두발을 휘젓고 있어야 한다. 결혼한 워킹맘을 가정한다면, 양가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 직장상사와 부하 등 하루에도 수십 명의 상대방에 따라 적절한 자아로 변신하며 1인 다역의 연극을 매일같이 해내고 있다. 마흔 살의 하루는 참으로 녹록지 않다.
마흔 살, 현재 나의 자아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 되는 것 같다.
(1) 자식으로서의 나, (2) 아내로서의 나, (3) 팀장으로서의 나
현재 나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이 정도지, 자녀가 있다면 부모로서의 자아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할 거다.
먼저, 자식으로서의 나는 형편없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나는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딸이다.
어느 날은 엄마가 갑자기 아프다는 연락을 해서 급하게 남편이랑 친정에 내려갔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엄마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랑 사위 아침밥 해준다고. 순간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아프다는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밥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버럭 하고야 말았다. 내가 화를 내도 엄마는 조용히 아침밥을 차려 나에게 먹이고야 말았다. 엄마의 조건 없는 사랑 앞에서 나는 항상 패자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 못 할 거다. 엄마가 되지 않는 이상. 자식은 평생 부모님이 준사랑의 반도 돌려주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 자식으로의 나는 항상 NG(No Good) 연발이다.
둘째, 아내로서의 나는 비교적 잘 해내고 있는 중이다. 결혼한 지 1년 뒤에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을 하는 바람에 현재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는데, 누구는 부러워한다지만, 나는 남편을 만나는 금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같이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을 꼽자면, '남편'이다. 음식취향, 개그코드, 삶에 대한 태도가 비슷하고, 모든 면에서 맞지 않는 것보다 맞는 것이 훨씬 많다. 자녀를 낳지 않게 된 것도 남편과의 둘만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마냥 좋아서 자연스럽게 합의가 되었다. 앞으로 이 사람과 40년, 길게는 60년까지도 살 텐데 그 시간들이 지겹게 느껴지기보다, 기대가 된다. 노후에 마음이 맞는 오래된 친구가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
셋째, 팀장으로서의 나는 매일매일이 걸음마 연습 중이다. 팀장 발령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직도 역할 습득이 부족한 나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연차가 쌓여 자연스럽게 리더가 됐지만, 난 누군가를 이끄는 재주가 없다는 것만 점점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 역할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은 꾹 참아보고 있다. 현재로서는 나의 가장 버거운 자아이고, 탈출하고 싶은 자아이다.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인데, 또 그만큼 스트레스를 한가득 안겨주는 괴로운 자리이다.
여러 가지 역할들을 모두 잘하려고 하다 보면, 전부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전부 잘 해내는 훌륭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다. 하지만 한정적인 시간에 모든 것을 잘 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시간에 내가 집중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그 시간만큼은 그 자아에게 100% 집중해야 한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일요일만 되면 출근 걱정에 예민함이 폭발해서 소중한 남편과의 주말을 쓸데없는 걱정으로 채운적이 있고, 회사에 정작 출근하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투루 보낸 시간이 많았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나 자신이다. 고쳐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자존감 부족에서 오는 약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제일 엄격한 평가자가 되어 나의 여러 역할들 중에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잘 해내고만 싶은 마음은 접어두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자기세뇌 인지도 모른다. 마흔 살의 성공적인 1인 다역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는 것,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