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하지욕 袴下之辱 - 큰 뜻을 위해 치욕을 참다.
이 이야기는 신문기사도, 다큐멘터리도 아닙니다. 다단계 업계에서 3년간 몸담았던 지인에게서 들은, 살아 있는 증언입니다.
드라마 속 다단계 업자들은 대개 폭력배처럼 그려집니다. 감금하고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죠.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주먹이 아니라 계약서였습니다.
종이 한 장, 서명 한 줄. 그것이 쇠사슬보다 무겁게 사람의 팔목을 묶습니다.
“1대 1로 몸싸움을 벌이고,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서로 묻지 않는다.”
만약 이런 계약서에 싸인했다면 어떨까요? 싸움 끝에 평생의 후유증이 남아도 상대는 처벌받지 않습니다. 협박이나 폭력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성인이 직접 서명한 계약은 법적으로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폭력은 계약을 무효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업장은 종종 난장판이 됩니다. 피해자의 오빠와 운동선수 출신 친구들이 몰려와 고함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려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업자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계약서를 꺼내 들고, 미리 짜둔 대본을 읊습니다.
“위약금을 내셔야 합니다.”
계약이 아무리 불합리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경찰을 불러도, 변호사를 데려와도 결국 돈을 내야 합니다. 심지어 업자들은 일부러 분노를 자극합니다. 피해자 가족이 집기를 부수거나 손찌검을 하는 순간, 역으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장사꾼이라면 몸이 상하는 위험을 감수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기가 부서지는 것보다 오히려 몸이 상하기를 기다립니다.
왜일까요?
그들의 수입이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SNS에 뿌려대는 명품과 외제차 이미지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다단계 업자의 99%는 빚더미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단계 구조에 있습니다. 다단계는 ‘돌멩이’에서 시작해 ‘다이아몬드’까지, 그 사이를 오팔,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 계급으로 나눕니다.
이번 달 1000개 팔아 오팔.
다음 달 2000개 팔아 루비.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첫째, 루비 등급을 유지하려면 매달 2000개를 팔아야 합니다.
둘째, 만약 한 번이라도 못 채우면 루비에서 오팔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돌멩이’로 추락합니다. 이것이 다단계 업계가 가진 치명적인 독소 조항입니다.
대기업 영업부장이 한 달 실적을 못 채웠다고 곧바로 인턴으로 강등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진짜 돈을 버는 사람은 이 판을 짠 다이아몬드, 즉 사장 한 명뿐입니다.
그래서 업자들은 친인척, 친구, 후배까지 닥치는 대로 끌어들입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현금서비스까지 긁습니다. “그냥 포기하면 될 텐데”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주식이 일주일 만에 반 토막이 났다고 합시다. 바로 손절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부자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대출까지 받아 무리하게 물타기를 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바다 한가운데서 소금물을 마시는 겁니다. 갈증은 풀리지 않고, 죽음만 빨라집니다.
다단계도 같습니다. 루비에서 돌멩이가 된다는 건 단순히 돈만 잃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겁니다. 기술도, 인맥도 없는 그들에게 남는 건 빚뿐입니다. 그러니, 허황된 꿈이라도 꾸며 계속 그곳에 남는 겁니다. 그러나 생활이 막막하니 되려, 피해자 가족들이 찾아와 자신을 손찌검 해주길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호구를 낚으려면 ‘나는 성공했다’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생활은 지옥인데, 겉으로는 부자의 미소를 항상 연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멘탈을 혹독하게 단련합니다.
그들에게 멘탈은 생존의 밧줄이자 자존심입니다. 흔들림 없는 얼굴 하나가 호구를 낚는 미끼이기에, 폭력이나 분노는 곧 패배의 증거가 됩니다. 순간의 감정은 계약서를 무효로 만들고, 이미지의 균열은 다음 호구를 놓치게 합니다.
업자는 호구가 “나도 저렇게 거만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감정을 억누릅니다. 또한 그들은 결코 가벼운 농담이나 장난으로 분위기를 바꾸지 않습니다. 웃음은 긴장을 풀어주지만 동시에 권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피해자의 오빠가 참지 못하고 업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보통상황이라면 화를 내거나 싸움이 벌어졌겠죠. 그런데 업자는 조용히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더니, 부처 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내가 너 같은 피라미에게 화를 내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요?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공허함이 피해자 가족의 얼굴을 덮쳤습니다.
철학자 강신주 작가는 말했습니다.
“산은 움직이지 않아서 산입니다. 태풍이 분다고 산이 흔들린다면, 그건 산이 아니라 가벼운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그들은 산처럼 버팁니다.
치욕을 삼키고, 빚더미 위에 앉아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을 훈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치욕 앞에서 매번 돌멩이가 됩니다.
창피함에 주눅 들고, 두려움에 무너지고,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죠.
그렇게 흥분해 침을 뱉은 건 선량한 우리(서민)였고,
침착하게 미소 지은 건 나쁜 업자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침착한 미소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앞에 돌멩이가 아니라, 산으로 설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라, 치열해라, 절실해라. 그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화장실만 급해도 사람은 치열해지고 절실해집니다. 그러나 다녀오면 곧 잊습니다. 그런 동기부여는 오래가지 않죠.
대신, 불편한 진실 하나만 전하겠습니다. ‘서민이니까 도둑보다는 부지런하다’는 믿음은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듭니다. 그 믿음에 매달리면, 우리는 결국 홍길동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바꿔주길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 나타나는 건, 대중의 환심을 수익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가짜 부처’일 뿐입니다. 그들은 결코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끝으로 이 글은 범죄자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무심히 깔보며 지나쳤지만, 정작 생존에서는 가장 유효한 ‘실전의 자세’들이 있었습니다.
교육(자기개발), 독서, 절제, 평정심.
그들은 그것들을 자본주의 생존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 무기, 이제 당신도 손에 쥘 준비가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