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다. 나와 10여 년을 함께한 반려견인 웅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이가 점차 들면서 기력은 쇠해져 갔지만, 건강했다. 그런데 갑자기 떠나버렸다. 언젠가는 웅이가 떠날 거라 생각했었다. 나에게 사랑을 알려준 웅이었다.
웅이는 가기 전에 끝까지 나를 배려했다. 웅이가 떠난 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거실 바닥에 핏자국과 배변이 있었다. 웅이는 쓰러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병원을 데리고 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뭔가 감각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웅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겠구나 하고 말이다. 웅이는 그렇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내 앞에서 웅이는 숨을 거뒀다. 그 광경을 코 앞에서 보는데도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웠다.
웅이는 유기견이었다. 누나랑 1년 남짓을 함께 지내다가 첫 조카를 낳고, 나와 지내게 되었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물어뜯었다. 버려졌다는 상처 때문인지 정서가 불안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안정적이 되었고, 정말 똑똑하게 커나갔다.
웅이에게 “앉아, 일어서”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빵야”를 가르쳤다. “손”과 “엎드려” 또한 말하면 바로바로 알아들었다. “돌아”도 할 줄 알았다. 화장실 또한 알아서 잘 가렸다.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도 알아서 화장실을 잘 가렸다. 장소가 바뀌어도 화장실을 가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집에서 일하는 날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쉬거나 누우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나에게 와서 안기고 핥아주었다. 웅이는 그렇게 나에게 사랑을 알려줬다. 일방적인 사랑을 나에게 알려줬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고, 나는 그 이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심장에 구멍이 나는 게 이런 느낌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집에서 정말 주저앉아서 울 때, 웅이가 자신의 몸을 나에게 비비며 위로해 줬다. 웅이는 나의 마음을 잘 읽어줬다.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날에는 노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줬다. 혼자 살아온 시간이 길지만 웅이 덕분에 혼자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웅이는 애교가 너무 많은 아이였다. 겁도 많은 아이였다. 사랑도 많은 아이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거 같다. 집에 들어올 때면 웅이가 나를 반겨줄 거 같고, 누워있으면 내 배 위로 올라와 나를 핥아줄 것만 같다.
웅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날. 나는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거기서 한 참가자가 자신의 강아지와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 반려견이 떠나고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날 낮에 릴스에서 조현철 배우 겸 감독이 한 시상식에서 아픈 아버지게에 하는 말을 봤다.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했다. 독서모임에서 이것에 관해서 나눴었다.
웅이를 떠나보내고, 이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존재 양식의 변화“ 지금 현실에서는 볼 순 없지만 웅이는 내 안에 살아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충분히 슬퍼할 것이다. 충분히 애도할 것이고, 충분히 그리워할 것이다. 그래야 현실을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웅이를 떠나보내면서 나이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나이 들어감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받아들여야지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우리 부모님도 나도 우리 모두 언젠가는 존재 양식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이 오늘을 더 충실히, 충만히 살아가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100일 글쓰기 / 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