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한 기록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대한 단상

by 기하

뒤늦게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꽂힌 부분은 '흔하고 일상적인 차별' 부분이었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p.60


나는 내가 차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사회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고, 약자의 편에 서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때로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는 차별은,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내 입을 통해 내뱉어지곤 한다.


나는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 이런저런 과외를 하며 돈을 벌었고, 때론 학원 강사로 일했다. 강사로 일하다 보면 학생의 보호자와 통화를 하거나 면담을 할 일이 종종 생긴다. 보호자는 대체로 어머니들이다. 그래서 학생과 같이 있는 여성 어른의 모습만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란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할머니일 수도, 이모일수도, 고모일 수도, 숙모일 수도, 언니일 수도, 아니면 친족관계가 아닌 또 다른 누구일 수도 있다.


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막상 내 생활 속 언어습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통화 멘트를 당연하다는 듯 답습했고,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다는 학생에게 "어머니 아버지랑 다 같이?"라고 물어보곤 했다. 정말 나는 섬세하지 못한 선생이자, 머리로 공부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문득 그러한 잘못을 깨닫고 반성했을 때, 나는 이미 강사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그리고 한동안 일을 쉬었다. 때문에 이번에 새로 시작한 그룹 과외에서는, 나름대로 야심 차게 '보호자 멘트'를 준비해 갔다.


"제가 연락할 수 있는 보호자 연락처랑, 관계를 시험지 위에 써줘요. 뭐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언니, 오빠 누구든~"


솔직히 이 '보호자 멘트'를 끝냈을 때, 나는 꽤 뿌듯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 가능성을 조금은 줄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칭찬을 받고 싶었다. 나와 10년 지기인 J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칭찬을 받기 위해 이야기의 단층을 쌓아가는 와중이었다. 과외를 시작했다고, 첫날이라 학생들 레벨 테스트를 했고, 오리엔테이션을 했다고, 이야기를 듣던 J는 내게 물었다.


"학생들 보호자랑은 통화했고?"


나는 조금 놀랐는데, J의 입에서 당연히 "어머니랑 통화했어?"가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선량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동안 잘못됐던 행동을 바로잡았다는 것은, 이제야 평균적인 수준으로 들어섰다는 것과 같다. 그래 놓고서는 칭찬받기를 바란 내가 문득 머쓱해졌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그런 식이다. 책은 나를 끊임없이 머쓱하게 만든다. 내가 가졌던 '차별하지 않음'이란 환상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며 부끄럽게 한다.


여전히 나는 아주 높은 확률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테다. '보호자 에피소드'는 그동안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행했던 수많은 부끄러움들 중 한 조각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기록해두려 한다. 언젠가 또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삐약삐약 해대고 있을 때, 이 부끄러움의 조각을 보고 반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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