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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홍 May 31. 2022

평화는 쟁취하는 거야

주니어 카피 시절, 어느 매콤한 날의 추억

 적당히 평화로운 날들



 마지막이라는 말은 늘 아쉬움과 조급함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 회사를 옮긴 지 두 달이 훌쩍 넘었고 어느덧 올해의 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려 이곳에 글을 쓴다. 정확히 2주 만이다. 한참을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야금야금 사 모으던 주식에 조금 더 관심이 생겼다. 소탈하고 무탈하게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빡센 상체 운동의 후유증으로 매일 아침 아이라인을 그릴 때 팔이 안 올라가는 것 빼고는.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무사 무탈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그렇지 못한 날들을 숱하게 지나왔음을 기억한다.

 함께 커피를 마시다, 견해가 다른 두 상사 사이에서 난감했던 일을 토로하는 선배 카피 앞에서 나는 문득 한 얼굴을 떠올렸다.

 인생의 웬수는 직장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이 인간이 나에게 전생의 빚을 받으러 왔나 싶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던 상사의 얼굴. 한때는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괴로웠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 졌다. 주니어 때, 나를 1년 넘게 지독하게 괴롭혔던 상사. 내가 겪은 최악의 상사인 그녀는 소시오패스였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나중에 알았다. 그런 사람을 두고 정신병리학적으로 소시오패스라 칭한다는 것을.




 어느 도라이의 추억



 그 상사는 내가 입사한 첫 주에 나를 불러다 자신이 정신과에 다닌 병력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대리를 달 때까지 한 번도 카피를 써본 적이 없다면서, 자신의 사수가 자기를 엄청나게 괴롭혀서 정신과에 다녔다는 것이 요지였다. 초면인 아랫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가 황당했지만, 안물안궁이기도 하고 남일에 무신경한 편이라 그런가요 하고 나는 예사로 들어 넘겼다. 그녀가 본색을 드러낸 것은 내가 입사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였다.


 그녀는 항상 모두가 참석하는 아이디어 회의 직전, 아무도 없을 때 나에게 다가와 자신이 쓴 카피 프린트를 내게 건네며 '이거를 네가 썼다고 하고, 네가 쓴 걸 내가 썼다고 해. 네가 쓴 거 내놔.'라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안다. 글 쓰는 업이라면 더더욱 안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빈말로라도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없음을. 카피라이터로서의 직업 정신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도 없는 듯한 사람. 그게 내 상사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랫사람은 상사를 고를 수 없다. 그녀는 내 바로 위의 시니어 카피였고, 나는 주니어였기 때문에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본인이 요구한 대로 다 해주었는데도 그녀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거짓말은 디폴트에 직급 찍어 누르기는 기본. 너는 카피를 못 쓴다느니. 카피라이터를 할 자격이 없다느니. 가스라이팅까지. 할 일이 남아 야근을 해야 할 때는 야근하지 말고 집으로 꺼지라고 하고 (정말 '집으로 꺼지라'고 말했다.), 정작 업무가 없을 때에는 나를 잡아두었다. 정상인의 사고 회로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나 마음의 병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지만, 그녀는 찐(?)이었다. 당시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였는데, 나는 진심으로 그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이 될 정도였으니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카피 팀장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묵인했다. 주니어 한 명만 데리고 일하기는 내가 버거우니, 나는 네 편에 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가만히 있는 내게 ‘숨소리가 거슬린다’며 ‘숨을 작게 쉬라’고 말했다. 코딱지만한 카피 룸 안에서 전자담배를 펴대는 사람에게 숨소리를 지적 받다니. 정말 두 배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거의 매일 두통과 복통에 시달렸다. 그들과 함께한(?) 한 해 동안 병원비가 100 이상을 찍었음을, 나중에 연말 정산을 하고서 알게 되었다.


 참고 또 참고, 졸라(?) 참던 어느 날, 나는 조용히 결심을 했다. 한 번만 더 선을 넘으면 직급이고 뭐고 맛 대 맛(?)하고 퇴사를 하기로. 중요한 경쟁 피치의 첫 아이디어 회의 직전, 그녀는 여느 때처럼 나에게 카피를 요구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죄송하지만, 카피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와 나 단 둘 뿐인 카피 룸에서 나는 그녀에게 욕을 배부르게 처먹었다. 그리고 회의에 들어가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미리 따로 정리해둔 카피를 사람들 앞에서 내보였다. 반응이 괜찮았고, 기획 부사장에게 아이디어가 좋으니 디벨롭을 해서 가져가자는 칭찬을 받았다. 동료들에게 처음으로 카피가 팔린 순간이었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잠깐 얘기 좀 하자며 나를 따로 불러냈다.

 텅 빈 대회의실,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그녀는 나를 보고 물었다.

 

 "너 여기 계속 다닐 거야?"

 "네."

 내 대답을 듣더니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여기 계속 다니면 내가 계속 괴롭힐 건데, 그래도 다닐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 머릿속에서 아주 얇은 실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짐을 느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웃어?"

 그녀는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아, 진짜 무서워서 회사 못 다니겠네."

  



 맛 대 맛



 도라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너보다 내가 더 도라이임을 보여주는 것.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버벅대는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다시 말해줄까? 너 때문에 무서워서 회사 못 다니겠다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지. 속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마술처럼, 타라! 경악하는 나와 폭주하는 나. 둘 다 부정할 수 없는, 웃픈 내 모습이었다.

 어버버 거리는 상사를 뒤로하고 대회의실을 나서는 나를 향해 그 인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가! 너 지금 나한테 뭐랬어! 악을 쓰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표 내러 간다. 쫓아오든가."

 내게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겨우 2년 차. 짧았던 카피 인생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구나. 앞으로 뭐 먹고살지.
 오만 생각이 스쳤지만 후회는 없었다.




 사필귀정을 아시나요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줄리어스 시저의 말이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느냐고? 다행히도 내 카피 인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가 힘들어하고 있던 것을 이미 눈치채고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던 시디는 내가 낸 사표를 받지 않았고, 내가 문제라며 나를 내보내겠다고 하는 카피 팀장에게 여태까지 그녀의 공으로 돌아갔던 내 업무 성과를 수면 위로 꺼내 그가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정말 황당했던 것은 문제의 그날(?) 이후 나를 괴롭혔던 두 카피 상사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하고 상냥하기가 이루 말할 수없이 180도 돌변한 태도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낮은 연차의 여직원들만 골라서 괴롭힌 정황, 다른 기획 팀장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던 정황이 드러나 그녀는 한동안 몸을 사리는 듯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카피 팀장의 갑작스러운 퇴사 후, 자신이 팀장이 될 거라는 말을 하고 다니다 기어이 대표 앞에서도 무리수를 둬 대표가 직접 팀장 회의를 소집해 그동안의 일들을 모조리 보고 받게 되었다. 얼마 뒤, 그녀는 회사에서 쫓기듯 나갔다.

 나중에 다른 동료들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인맥을 통해 들어간 회사에서 외주로 일을 하다가 성과를 못 내서 이 바닥을 아예 떴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했던 날, 뭔지 모를 허탈함에 혼자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방송국이나 광고업계는 예로부터 전국 팔도의 미친놈들이 죄다 모여드는 바닥이라고들 한다.
 튀면 밟고, 못 튀어도 밟혀서 묻히고 잊히는 곳. 사람을 향하고 사람과 부대끼는 일이라 업무 강도가 높은 것과는 별개로 외적인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광고업계 종사자들은 일의 수명이 짧고, 생명 수명도 짧다. 트렌디하고 쿨해 보이는 달의 뒷면은, 사람의 진을 빼고 피를 말리는 업이라는 것. 자기 수명 깎아가면서 일한다는 말은 이 업계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가끔 광고업계 익명 오픈 채팅방에 상사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주니어들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그때마다 다들 피를 토하면서 조언을 해주는데, 그게 참 남 일 같지 않다. 혹시나 사람 때문에, 특히 직장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냥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좀먹어가면서까지 참아야 할 일은 없다고.
 참는 것만이 능사라고 되뇌며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오만이며 착각이라고.

 그러니, 눈물 닦고 잠이나 빨리 자길.


 야근 후 퇴근길,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만난 시 한 편을 건네본다.



「나은 사람」



집 나설 때

호주머니 가득 채워 갔던 자존심

돌아올 때 홀쭉해져서

빈 주먹만 채워 돌아왔다

그럴 땐 누가, 조금이라도

툭 건드리면 얼굴이 후드득 한다

그럼에도 앞을 보며

검게 비친 너를 보며,

어깨를 잘 펴보는 너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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