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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홍 Jun 07. 2022

바람 먹고 구름 똥

비 오지 않는 날에도 비 오는 날을 생각함

 이 가문 날에 비구름



 비 소식을 들었다.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집을 나설 만큼 바지런한 사람이 아닌 나는 다른 이를 통해 듣는 비 소식이 내심 반갑다. 단조로운 일상에 던져진 작은 변수.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더 구미가 당기는 나는 아주 잠깐 유쾌하다 이내 가라앉는다. 젖어드는 종이처럼 서서히 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느끼며 꽉 죄어진 나사 같던 나를 느슨하게 놓아준다. 햇볕 뜨거운 날 보다 그늘 진 흐린 날이 좋은 이유다.




 순수의 시대



 중학생 때였나. 한결같이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비 오는 날 우산이 없기 일쑤였다.

 잊거나 잃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던 나에게 비는 늘 느닷없이 내렸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우산을 함께 쓰고 오곤 했는데, 한 날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었던 것인지 친구들을 제쳐둔 채 혼자 빗길에 나섰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빽빽이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망설임 없이 그 비를 뚫고 걸었다. 마사지 건을 갖다 댄 것 마냥 드드드드 얼굴을 때리던 그 빗줄기. 동네 아파트 단지에 다다를 즈음에는 뜬금없이 비가 멎었는데 흠뻑쑈가 따로 없었다. 하얀 와이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살갗이 훤히 보이고 짙은 쑥색의 교복 치맛단에서는 물기가 뚝뚝.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 마냥 죄다 젖었는데 기분만은 참 시원해서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십 대의 패기였을까. 고리타분한 청춘 드라마의 한 씬처럼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 혹시 중2병이 아니었을까. 온 세상이 나를 축으로 돈다고 믿던 때.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그 믿음은 보기 좋게 박살나버렸지만. 이따금씩 꺼내어 보면 그날 장대빗속을 걷던 내 모습이 남 일인 양 멀게 느껴지면서도 선명하다. 그리고는 오래 그립다.




 비 맞는 여자



 오늘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다던 비는 저녁 여덟 시 이후로 밀려나 40퍼센트의 강수 확률을 보이고 있다, 고 스마트하지만 잘 들어맞지는 않는 날씨 어플이 말해준다. 책상의 맨 윗 서랍을 열어 비상용으로 넣어둔 삼단 우산이 잘 있는지 확인한다. 몇 년 전 카페에서 누군가 두고 가서 주워온 회색 우산이다. 내가 잃어버린 우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우산처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책상 서랍 속에 있을까.

 가끔씩 그때 그날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손에 들린 우산을 접어두고 빗속을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미친년 날궂이 한다'는 옛말에 딱 들어맞는 본보기가 될까 두려워,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마음은 잘 개켜 가슴 한 켠에 고이 접어 넣어둔다. 오늘따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곤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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