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사람들이야기| 양촌떡집 나윤규·이정순 부부
양촌떡집이 있는 곳은 화지시장 농협골목이다. 제2주차장 초입이다. 9구역인 이 골목은 예전에 청과물시장이었다. 우체국까지 이어지던 과일가게들은 발디딜 틈 없이 북새통이었다. 37년 전, 그러니까 1985년 나윤규·이정순 부부가 시장에서 떡집을 개업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상인회사무실, 농협 외에도 아시아마트도 둘이나 들어와 있다. ‘햇살농원’ 마트에서는 양촌에서 직접 키운 베트남야채도 판다. 시장의 주요고객이 된 외국인들은 평일 30% 주말에는 40%를 상회한다. 이들은 K-떡집에도 들른다. 베트남인들이 선호하는 떡은 기중떡(술떡)이란다.
요즘 같은 겨울철, 양촌떡집에서 인기있는 떡은 호박설기이다. 쌀을 적정히 불리고 빠아서 체 내리면 밀가루처럼 된다. 그걸 무지로 하면 백설기인데, 거기에다 노란호박 넣으니 호박설기다.
설명을 들어서인지 여러 떡 중 기자의 손이 제일 먼저 간 게 호박설기다. 달달하되 연속 먹어도 물리지 않는 부드러움이다. 가래떡 사러오는 손님이 다녀갔다. “김으로 가래떡을 감은 다음 들기름이나 꿀을 찍어 먹어보세요. 즉석 요리로선 최고인데, 생목도 안 올라와요.” 인기 있는 떡에 이어 독특한 떡 이야기를 청하니 ‘떡은 시대의 변천사’라는 서론을 깔면서 당고떡을 들고나온다.
1987년 논산에 수해가 있었다. 그때 남은 인절미로 개발한 당고떡이 10여 년 논산떡시장을 지배하였다고 술회한다. 단고떡, 경단떡이라고도 하는 이 떡은 찹살말이떡이다. 계란말이를 연상해도 좋단다. 카스테라에 빵가루 묻히듯 찹쌀에 단고를 넣어 말은 찹쌀떡인데, 그 비법은 일체 비밀로 붙였기에 4~5년은 독점하였다. 그 후 보편화되었지만 IMF 이후에는 거품이 빠져갔다. 사람들 입맛도 변하여 단 것을 멀리하게 되는 추세여서였다.
당고떡만 그런 게 아니다. 떡집의 전반적인 경기도 하강곡선이다. 1985년 양촌떡집 개업 당시부터 밀레니엄 2000년까지 떡집의 호황기는 이어졌다. 당시 1주일에 들어가던 쌀 13~14가마가 요즘은 2~3가마로 팍 줄어들었으니 20%대로 급감한 셈이다. 호황기에 종업원이 4명이었으나, 지금은 떡 제조부터 배달까지 두 부부가 감당하고 있다.
이런 곡선은 사회의 변천사를 그대로 반영해왔단다. 농촌 곳곳에서 치루던 혼사나 환갑잔치, 초상 들이 사라졌다. 작년에는 코로나 등으로 행사떡마저 대부분 사라지고, 요즘은 업체 대신 개인 손님들을 상대하는 소매 장사다. 와중에도 도매격인 납품은 간간 이어진다. 무속인과 절에서 꾸준하게 찾아주고 있다.
“입구에 福자 거꾸로 해놓았는데, 시선집중 효과를 노린 건가요?” 기자의 질문에 나사장은 중국사람처럼 답한다. “중국에서는 복이 하늘에서 쏟아지라고, 저렇게 거꾸로 달아놓는답니다.” 양촌떡집은 연중무휴다. 그러나 한여름 비수기에 일주일 정도 해외여행도 떠난다. 부부는 번갈아가면서 등산이나 드라이브로 각자 나름의 충전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여유는 가뭄에 콩나듯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가래떡, 바람떡, 찹쌀모찌 등등 그날 하루치 떡을 만든다. 떡은 즉석식품, 즉 유효기간이 하루뿐인 단일식품이다. 초파일 같은 때는 밤샘작업도 불사한다.
지난 추석때는 전년대비 매출이 상승하였다. 가게 앞에 오가는 이들 시식하라고 송편을 내놓았는데, 한두 개 집어먹은 사람들이 곧바로 직구하였기 때문이다. 차례 지내기 전 다 먹어서 다시 사러왔다는 손님도 있었다. 쌀 10가마니가 동나고 피곤이 몰려왔지만 “맛있어서 또 왔어요” 소리에 밤샘 피로가 일순 녹아난다. “송편노하우도 당고떡처럼 비밀인가요?” 기자의 질문에 나사장은 반죽과 집어넣는 ‘소’의 차이가 비결이라 답한다. 송편은 초창기에는 수작업였는데, 요즘 기계화는 되었지만 위생적이라는 장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떡의 화룡점정은 간, 즉 소금이나 설탕의 양이란다.
떡 만드는 기술이 비밀 같지만 나사장은 강의도 나갔다. 공주대 예산캠퍼스에 식품과학생과 일반인들이 수강하는 전통떡협회 강의, 필기와 실기 1주일에 두 번씩 출강하였다. 습도, 수분함량, 소금 설탕 배합 등 종합적인 노하우가 녹아들어가는 강의를 쌀 주산지인 논산에서도 하면 어떨까 싶다.
70년대 서울에서 사업가였던 그가 부도를 맞은 후 방황해야 했을 때, 그를 붙잡아주던 여인이 있었다. 묻지고 따지지도 않은 채 그를 지지했고, 처갓집에서도 응원해주었다. 동두천에서 떡집을 하던 처남 밑에 가서 떡일을 배웠고, 일년 후 독립하였다. 처갓집이 있는 논산으로 내려와 초두비용 300 중 200은 처가 도움을 받아 가게를 열었다. 새댁 이정순의 출신지(양촌초등학교 47회 이정순 졸업생) 이름을 따서 #양촌떡집 간판을 내걸었다.
그 후 두 부부는 명절도 반나절만 쉬면서 38선 억척행진을 계속해왔다. 그 결과 현재는 보증금 없이 통사정하고 들어갔던 점포와 그 옆의 두 점포, 2층 당구장까지 포함한 상가건물의 건물주가 되었다. 69세 동갑인 부부는 점포를 트면서 확장한 떡집을 사위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초창기 4명 종사자 중 2명은 여동생 내외였는데 당시 청주로 떡집을 분가하였다. 머잖아 사위가 떡을 배우면 두 부부는 기름짜는 일 등으로 역할분담을 생각하고 있단다.
일견 떡은 사양산업처럼 보인다. 선거철 엄청 잘 나가던 떡은 현역의원 의정보고회 자리에서도 퇴출되었다. 빵·과자 같은 다과만 허용되는 희한한 규제다. 농장이나 건축현장의 새참 역시 빵과 우유가 주류(主流)다. 떡을 먹으면 훨 더 든든한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떡은 여전히 비전이 있다. 외상도 없고, 깎으려 하지도 않는다. 얹어주는 덤 문화는 우리 식문화, 인정(人情)의 상징이다. 떡을 먹자. ‘정 듬뿍’ 1등은 밥, 그 다음 2등은 떡이다.
양촌福떡집
☏041-735-4136
화지동 49-1 화지시장 농협앞
[글·사진] 이지녕
위 글은 『놀뫼신문』 2021-02-08일자 2면에 실렸습니다.